● 고려 왕조실록 요점정리
■ 1대왕 태조왕건 877년-943년 재위기간 918년-943년. 25년
● 태조 왕건과 민족 대화합의 결정체 "고려" 본관 개성. 자 약천(若天). 성 왕(王). 휘 건(建). 시호 신성. 금성태수(金城太守) 융(隆)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위숙왕후 한씨이다. 895년(진성여왕 9) 아버지를 따라 궁예(弓裔)의 휘하에 들어가 898년 정기대감이 되고, 900년 광주·충주 등을 공취, 그 공으로 아찬의 위계를 받았다. 903년에는 수군을 이끌고 전라도 지방을 공략, 궁예의 영토를 확장하여 알찬에 승진되고 계속하여 전라도·경상도 지방 에서 甄萱의 군사를 격파하는 한편 정벌한 지방의 구휼에도 힘써 백성의 신망을 얻었으며, 913년 侍中이 되었다. 918년 세력이 강대해짐에 따라 난폭한 행동을 자행하는 궁예가 민심을 잃자 홍유· 배현경 등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어 즉위, 국호를 ‘고려’라 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 정하였다. 이듬 해 수도를 송악으로 옮기고 융화정책·북진정책·숭불정책을 건국이념으로 삼아 정책을 펴나갔다. 즉, 지방 호족들을 회유·무마하는 한편, 서경을 개척하고 여진을 공략했으며 불교를 호국신앙으로 삼아 각처에 절을 세웠다. 935년 투항해 온 신라 경순왕을 맞아 평화적으로 합병하고 이듬해에는 앞서 항복해 온 견훤과 함께 신검의 후백제를 공격, 이를 멸망시켜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이 해 《정계》 《계백료서》를 저술하여 정치의 귀감으로 삼게 하고 943년 후세의 왕들이 치국의 귀감으로 삼도록 訓要十條를 유훈으로 남겼다. 서예에 뛰어났으며, 능은 현릉(개성)이다. 태조는 신라와는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후백제와는 무력으로 맞섰다. 처음에는 군사적인 열세로 후백제에게 계속 패했으나 930년 고창(古昌:지금의 안동)싸움에서 큰 승리를 거두면서 주도권을 장악했다. 그뒤 935년에 투항해온 경순왕을 맞아 평화적으로 신라를 병합했으며, 936년에는 후백제 를 멸망시켜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했다. 통일 직후 태조는 직접 政誡 1권과 誡百寮書 8편을 저술하 여 반포했다. 이것들은 새 통일왕조의 정치도의와 신하들이 준수해야 될 절의를 훈계하는 내용이었 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자처하며 북방을 개척하여 만년에는 서북으로 청천강 하류 安州 지방에서 동북으로 永興지방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또한 거란에 의해 멸망한 발 해의 유민들이 망명해오자 이들을 따뜻하게 맞이하여 민족융합의 전기를 마련했으며 거란과는 국교 를 단절했다. 943년 죽기 얼마 전에 大匡 朴述熙에게 훈요 10조訓要十條를 남기면서 후세 왕들이 대대로 귀감으 로 삼도록 했다. 훈요10조를 통해서 볼 때, 태조의 정치이념을 뒷받침하고 있는 사상은 불교와 지 리도참설, 유학이었다. 불교와 지리도참설은 새 왕조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으며, 유학은 정치의 실 제적인 실천윤리로서 존중되었다. 특히 태조는 불교를 적극 장려하고 육성시켜 건국초기부터 많은 사찰을 지었고, 국내외의 고승을 극진히 예우했다. 943년 재위 26년 만에 죽었다. 건국초기 왕건은 정주유씨, 평주유씨, 경주김씨, 황주황보씨, 광주의왕씨, 충주의유씨 등 지방호족 딸들과 혼인함. 거란과는 적대관계 - 942년 10월 거란이 사신 30여명과 낙타50필을 보내와 고려와 화친을 제의하 나 단호히 거절함. 왕건은 일찍이 거란이 발해와 동맹을 맺고 있다가 갑자기 의심을 품어 맹약을 배반하고 그 나라를 멸망시켰으니 이는 심히 무도한 나라로써 친선관계를 맺을 대상이 못 된다고 못박았다. 그리고 거란과의 국교 단절을 선언하고 사신은 섬에 귀양 보내고 낙타는 만부교 다리 밑 에서 굶겨 죽였다. ● 최응 [898~932] -고려시대의 문신. 본관 黃州. 시호 희개. 五經에 밝고 문장이 뛰어나 궁예 밑 에서 한림랑으로 있으면서 신임을 얻었다. 915년(신덕왕 4) 궁예가 왕건에게 모반의 누명을 씌울 때 왕건이 변명하자, 장주掌奏로 그 자리에 있던 최응이 붓을 일부러 뜰에 떨어뜨리고 주우러 내려 가, “굽히지 않으면 위태롭다”고 왕건에게 귀띔, 굴하게함으로써 화를 면하게 하였다. 그 후 왕건이 즉위하자 지원봉성사를 지내고, 이어 광평낭중 ·내봉경 ·광평시랑 등을 지내면서 태조의 총애를 받 았다. 대광 태자태부 ·사도에 추증,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 고려개국공신 4인방 홍유 : ? - 936년 홍유의딸이 왕건의 제26비 경북 의성 출신. 배현경 : ? - 936년 경주출신. 신숭겸 : ? - 927년 전남 곡성출신. 3세때 춘천으로 이사 호는 능산 본관은 평산 평산신씨 의 시조. 왕건과 사냥을 나갔다가 기러기 3마리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왕건이 날아 가는 기러기 중 3째 기러기의 날개를 맞춰 보라고해서 신숭겸이 화살로 기러기 날개를 정통으로 마 치자 왕건은 그 자리에서 전답 3백 결을 내리고 평산 신씨라는 성을 내렸다. 공산전투 때 왕건을 대신하여 왕건의 복장을 하고 싸우다가 전사함. 복지겸 : ? - ?
● 훈요십조 : 943년 병상에 누워서 후대 왕 들이 명심해야함 10가지를 박술희 에게 구술함. 1. 불교를 진흥시키되 승려들의 사원쟁탈을 금지할 것. 2. 사원의 증축을 경계할 것. 3. 서열에 관계없이 덕망이 있는 왕자에게 왕위를 이을 것. 4. 중국풍습을 억지로 따르지 말고 거란의 풍속과 언어를 본받지 말 것. 5. 서경에 일 백일 이상 머물러 왕실의 안녕을 도모할 것. 6. 연등회와 팔관회 행사를 증감 하지말고 거란의 풍속과 언어를 본받지 말 것. 7. 상벌은 분명히 하고 참소를 멀리하며 간언에 귀를 기울여 백성의 신망을 잃지 말 것. 8. 차령산맥이남 공주강 외각출신은 반란의 염려가 있으므로 벼슬을 주지 말 것. 9. 백관의 녹봉을 증감하지 말고 졸병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매년 무예가 특출한 사람에 게 적당한 벼슬을 줄 것. 10. 경전과 역사서를 널리 읽어 옛일을 교훈 삼아 반성하는 자세로 정사에 임할 것.
● 원 왕실과 혈연관계를 조작한 고려왕실
김관의 의「편년통록」에 실린 왕건 조상들에 얽힌 이야기에 따르면 왕건의 아버지는 왕륭 이며 할아버지는 작제건, 증조부는 당나라 숙종으로 기록되어 있다. 충선 왕이 원나라에 잡혀 있을 때 원나라 한림학사 한 사람이 왕에게 다가가 이렇게 물었다. "듣건대 대왕의 조상은 당나라 숙종황제 에게서 태어 났다고 하는데 그것은 어디서 근거한 말입니까? 사실 숙종은 어려서부터 한 번도 대궐 밖으로 나간 일이 없고 안록산의 난이 있었던 때에는 영무에서 즉위 하였으니 어느 틈에 조선에 가 서자식을 둘 수 있겠습니까?" 라고 물으니 충선왕이 이 말을 듣고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편년강목」의 저자인 민지가 대신 대답을 하였다. 그것은 우리 국사가 잘못 쓰여진 것입니다. 사실은 숙종이 아니고 선종 이었습니다. 민지가 숙종을 선종으로 고쳐야 한다고 말하자 한림학사는 선종은 안록산의 난 때(753년) 오랫동안 외방에서 고생하였던 만큼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수긍했다. 하지만 고려왕조의 선조가 선종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이제현은 잘못된 이야기라고 논박하고 있다. 즉, 선종이 비록 난리통에 동방으로 왔다는 설이 있기는 하나, 그것은 단지 하나의 민담에 불과할 뿐, 실록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은 사실이라는 것이다. 이제현의 주장 대로라면 고려 왕실이 당의 왕족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런데 김관의나 민지는 왜 고려 왕실을 당나라 왕족과 연관시키려 했던 것일까. 당이 멸망하자 수많은 국가들이 난립했지만, 당의 문화와 전통은 여전히 중국을 지배하고 있었다. 따라서 고려 왕실이 당 왕실과 혈연 관계 있다는 것은 외교적 측면에서 유리하게 이용되었을 것이 다. 고려 왕실은 이러한 이점을 계산하고 의도적으로 당 왕실과의 혈연 관계를 조작했을 것으로 판 단 된다. 원의 팽창으로 송의 입지가 약해지고, 결과적으로 송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던 고려 왕실의 입지 역시 약해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에 따라 고려 왕실은 왕족의 권위를 세울 새로운 방향 을 모색해야 했고, 그 결과 당 왕실과의 혈연 관계를 조작했다는 것이다. 적어도 고려 중엽 당시에는 이러한 혈연 조작이 여러모로 쓸모있게 사용되었을 것이다.그러나 공민 왕대 이후 반원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민족주의가 고개를 들었기 때문에 고려는 더 이상 당 왕실과 혈연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오히려 원의 몰락으로 혼란을 거듭하고 있던 중국의 정세를 틈타 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하자는 운동이 일어나면서 고려는 당 왕실과의 혈연 조작 이 부담으로 작용했다. 고려 말의 대학자 이제현이 고려왕실과 당 왕실의 혈연 조작을 강하게 비판 한 것은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 제2대왕 혜종 912년-945년. 재위기간 943년-945년. 2년 34세 사망.
● 왕자무의 태자책봉을 둘러싼 역학관계
고려실록이 처음 편찬된 것은 제8대 현종 때 1011년 거란의 2차 침입으로 궁궐이 불타는 바람에 사초도 함께 소실 되었다. 실록편찬은 바로 이때 소실된 사료의 복원차원에서 1013년 9월 현종의 명으로 '칠대 실록' 편찬에 착수한다. 사초 소실로 과거사를 알 수없자 나이 많은 노인을 찾아다니며 사료수집 작업을 벌이고 사료수집이 완료되자 그것을 토대로 '7대실록' 이 편찬되었다. 고려실록편찬 사료들이 이처럼 허술한 구석이 있었기 때문에 혜종, 정종때의 왕위계승 다툼에 대한 내막은 정확하게 기록될 수 없었고 왕규를 역적으로 기록한「고려사」의 역사평가에서 신빙성이 없 는 자료와 정종, 광종의 역사왜곡 정책의 결과라고 볼 수있다.
태조가 죽자 혜종의 왕위계승에 불만을 품고있던 충주유씨세력과 신명순성왕후 소생들인 정종,광종 등이 본격적인 권력팽창작업에 들어갔다. 이에 혜종은 박술희를 대광에 임명하고 왕규를 중용하여 그들을 견제하였다. 하지만 왕요와 왕소는 서경세력의 핵심 왕식렴 등과 힘을 합치고 박술희와 왕규 에게만 의존하는 혜종의 태도를 못마땅해 하던 청주 유력가 김긍률을 끌어들이는데 성공한다. 또한 견훤의 사위이자 왕요(정종)의 장인인 박영규와 박수경,수문 형제등도 이들에 동조함에 따라 왕권은 점점 위축되어, 혜종은 침실을 옮겨 다니며 자야할 지경이었다. 왕규는 이러한 현실을 분통해 하며 혜종에게 왕요 형제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고변하고 역모세력을 엄단 할 것을 촉구한다. 하지만 혜종은 오히려 자신의 맏딸을 왕소의 두 번째 부인으로 내주면서 화해의 의사를 타진한다. 비록 왕규와 박술희가 보좌를 받고 있긴 했지만 혜종의 세력은 상대적으로 빈약했고 따라서 혜종은 왕요 형제와 화친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혜종의 화해 손짓에도 불구하고 왕요 일파의 왕권위협은 더욱 가속화되고 이에 시달리던 혜종은 마침내 병을 얻어 정사를 제대로 돌볼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945년 9월 34세의 젊은 나이 로 생을 마감한다. 「고려사」는 박술희가 반란의 뜻을 품고있어 정종에 의해 유배되었다고 쓰고있다.
■ 제3대왕 정종 923년-949년. 재위기간 945년-949년. 집권3년. ● 개경파와 서경파의 정권다툼과 왕요의 등극 개경파를 완전히 제거하고 무력으로 왕위에 오른 정종은 즉위 초부터 개경세력과 백성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치게 된다. 이 때문에 그는 서경으로 천도 하기위해 많은 인력을 강제 동원하여 평양에 왕성을 쌓기 시작한다. 하지만 천도계획은 오히려 민심을 이반시키는 결과를 가져와 정종에게 치명 적인 타격을 안겨 준다. 정종은 강인하고 고집스런 성품이면서 한편으론 불심이 깊고 고구려 고토를 회복하겠다는 신념이 강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종은 겉으로는 강한척하고 있었지만 내심으로는 백성들의 민심이 돌릴 까봐 마음을 졸였고 또 한편으로는 즉위 과정에서 너무 많은 인명을 죽인 것에 대해 죄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해 즉위하자 곧 손수 불사리를 받들고 십리 나 되는 길을 걸어서 개국사에 봉완하기로 했고 곡식 7만석을 풀어 각 사찰에 전달하기도 했다. 죄책감이 원인이 되어 불명경보와 광학보를 설치하여 불교를 장려하고 승려를 양성하는 등 불교 진흥책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그는 죄책감을 이기지 못했다. 948년 9월에 동여진의 대광 소무개 등이 말 7백필 과 토산 물을 바쳤는데 이때 손수 이 물건을 검열하다 갑작스럽게 몰아친 우뢰와 천둥소리에 놀라 경기가 들었다. 그로 인해 병상에 눕자 백성들은 부역에서 헤어 날수 있다 하여 좋아했고 이같은 민심을 전해들은 정종은 점차 기력을 잃었고 949년 3월 동복아우 왕소에게 왕위를 넘기고 세상을 떴다. 27세 때 정종이 죽자 서경천도 계획은 취소되었고 왕성건립도 중지되었다.
최승로는 「시무28조」와 함께 올린「5조 치덕평」을 통하여 서경 천도계획을 다음과 같이 평가 하고 있다. '정종은 참으로 그릇되게 믿고 왕성을 옮길 것을 결정 하였습니다. 그는 천성이 강한 반면에 고집을 고치지 않았으며 백성들을 난폭하게 끌어 모아 공사를 일으켜 사 람들 을 고생 시켰습니다. 그래서 비록 임금 스스로의 마음으로는 옳다고 하는 일도 백성들의 마음 은 동조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까닭에 원성이 일어났고, 재앙이 그림자처럼 빨리 나타나서 미쳐 서 경으로 옮기지도 못한 채 영영 왕위를 떠났습니다' 문공왕후와 문성왕후는 친 자매로 견훤의 사위인 박영규의 딸이다. 태조의 제1비 동산원 부인도 박 영규의 딸이다. 이같은 삼중결혼은 고려 왕실에서도 아주 드문 경우에 해당되는데, 이것은 태조의 후백제 호족에 대한 배려차원에서 이뤄진 일로 보인다. 이는 후백제 세력을 달래는데 박영규의 영향력이 지대 했음을 보여 준다.
■ 제4대왕 광종 925년-975년. 재위기간 949년-975년. 집권 26년. 25세 즉위. ● 광종의 강한 개혁작업과 호족들의 수난.
광종의 치세 첫 번째 시기 - 모색기 즉위7년까지. 두 번째 시기 - 왕권강화기 7년-11년. 세 번째 시기 - 호족숙청시기 11년- 집권 말 까지. 광종은 즉위 초부터 독자연호를 사용하고 951년 후주연호를 사용함 -여진과 거란을 경계하기 위함. ● 쌍기 : 중국 후주에서 고려에 귀화한 雙哲의 아들. 956년 후주의 시대리평 재임시 사신 설문우를 따라 고려에 와서 신병 때문에 체류하다 귀 화, 원보 한림학사가 되었다. 958년 당나라 관리임용제도를 따라 과거제도를 창설하게 하고 수차 지공거가 되었다. 이것이 한국 과거제도의 효시이다. 후주 태조의 왕권강화 작업에 깊숙이 간여한 인물. 이러한 개혁론은 오래 전부터 왕권강화 책을 강구하고 있던 광종에겐 천군 만마 를 만난 기쁨이었다. 이러한 쌍기를 고려조정으로 끌어들인 광종은 과감한 개혁작업에 착수한다. ● 광종의 개혁작업 ⓛ 노비안검법실시 : 노비의 신분을 조사하여 원래 양인 이었던 사람을 노비에서 해방시켜주는 일종의 노비 해방법. 호족세력 강력반발. 왕권이 강화되고 호족세력은 약세. 고려통일 전쟁 과정에서 포로로 붙잡힌 양인이거나 대호족의 강압에 의해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로써 대호족 들은 경제기반인 노비의 상당수를 상실. ②과거제도입 : 노비안검법 실시로 호족의 힘이 약화되고 왕권이 강화되자 958년 쌍기의 건의에 따라 전격적으로 과거제 실시. 960년에는 관료의 공복을 제정하여 품계별로 옷을 달리 입게 함으로써 왕과 신하의 관계를 분명히 하고 관리의 상하를 쉽게 판별 할 수있도록 했다.
■ 제5대왕 경종 955년-981년. 재위기간 975년-981년. 6년.
● 경종의 화합 정책과 호족 왕족들의 재등장.
경종은 좌우집정제와 전시과를 마련하여 왕권의 안정을 다짐. 전시과 : 관료들의 인품에 따라 토지를 분급 하는 제도. 979년 발해의 유민 수만 명을 받아들였고 청새진(희천)에 성을 쌓아 변방의 안정을 모색한다. 이시기에 발해의 유민 수만명이 고려로 왔다는 것. 곧 요를 세운 거란족이 체제를 정비하고 남하하 여 여진을 압박하고 동시에 고구려 유민에 대하여 차별정책을 실시함을 의미한다. 또한 고려가 일 시에 수만명의 이민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가 안정된 상태였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러한 평화기는 오래가지 못한다. 유배되어 있던 최지몽이 내의령에 임명되면서 고려 조정 은 다시 한 번 역모의 소용돌이에 휘 말리게 된다. 혜종 시절에 사천관으로 있던 최지몽은 왕규의 역모혐의를 고변한 인물로 정종과 광종의 즉위에 기여한 바 있다. 하지만 광종 재위시에 왕을 따라 귀법사에 갔다가 술에 만취하여 왕에게 주정을 한 죄로 외직에 나가 있다가 경종5년(980년)에 다시 등용된다. 이때 최지몽은 대광, 내의령관직과 동래군후의 봉작에 식읍 1천호를 받았다. 최지몽은 점성술이 능한데다 왕규를 제거할 때 깊숙이 관여한 바 있기 때문에 경종은 그의 예언적 능력을 정적 제거에 이용했던 것이다.
● 헌애왕후 : 997년 제7대 목종이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한다. 이때 목종의 나이는 18세 였으나, 그녀는 정권욕이 강했기 때문에 섭정을 자처하고 나섰던 것이다. 이때 그녀는 천추천에 거쳐 하였 으며 스스로 천추태후라고 불렀다. 그녀는 섭정기간 김치양과 간통하여 아들을 낳게 되는데 이 아 들로 하여금 목종의 대를 있게 하려 하였다. 하지만 당시 중신들은 안종과 헌정왕후 사이에서 태어 난 대량원군(현종) 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고자 하였다. 당시 대량원군은 헌애왕후의 강요로 머리를 까고 삼각산 신혈사에 머물렀는데, 그녀는 그를 죽이기위해 몇 번이나 자객을 보내고 독살을 계획 하지만 실패한다. 1009년 강조가 군사를 일으켜 김치양 부자를 죽이고 헌애왕후의 인척들을 귀양 보낼 때 그녀도 황주로 내쫓긴다. 이때 강조는 목종을 죽이고 대량원군을 즉위시키는데 그가 고려 8대왕인 현종이다. ■ 제6대왕 성종 960년-997년. 재위기간 981년-997년. 집권 16년.
● 유학정치 이념의 실현자 성종과 중앙집권 체제의 완성.
성종은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하는 등 연관회와 팔관회 등의 불교행사를 폐지하고 사회 전반 에 유학열풍을 불러 일으킨다. 거란은 발해를 몰락 시킨 후 당연히 고구려 옛 땅을 차지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신라의 뒤를 이은 고려가 이러한 요구사항을 들어주지 않으면 침략도 불사하겠다는 엄포에 고려 조정은 숙의 끝 에 거란에 대한 군사적인 대응을 결정하고 거란에게 고려는 신라의 뒤를 이은 것이 아니라 고구려 를 계승한 것이라고 분명히 밝힌다. 이에 거란은 993년 소손령을 대장군으로 삼아 고려를 침공한다. 이에 서희는 소손령과 담판을 통해 강동6주를 얻어내는데 성공한다. 이에 고려의 영토는 압록강변까지 확대대고 고려와 거란 사이에 있던 여진세력은 더욱 위축된다. 고려 초에는 여자의 재가가 허락되고 이혼이 인정되지만 왕이 재가녀로 왕비를 맞아들이는 예는 찾아볼 수없었다. 때문에 성종과 문덕왕후의 결혼은 광종이후 정착된 족내혼은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 종친들의 동의 하에 이뤄진 일이다. 하지만 문덕왕후는 왕규에게 시집가서 이미 딸을 낳은 상 태였다. 성종은 대종의 아들로써 왕위를 계승한 것이 아니라, 광종의 사위로써 계승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은 후에 제8대 현종의 왕위 계승에서도 재현되는데 아들이 없으면 사위가 왕위를 계승 하는 형태는 족내혼이 이뤄졌던 고려 왕족에서만 볼 수있는 특이한 계승법 이었다. 성종은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고 귀족들과 제휴해서 노비안검법을 폐지한다. 노비에서 면천됐던 사람들을 다시 노비로 환천시켜 귀족들에게 돌려주기로 한다.
● 3성 6부제 : 3성 : 중서성, 문하성, 상서성. 6부제 : 이.병.호.형.예.공부(순서별) 12목 설치 : 12목을 설치하여 지방제도를 정비하고 12지역에 주목(州牧)을 파견하여 호족세력을 억제하고 중앙의 명령을 지방까지 효과적 으로 하달하기 위한 행정체제. (양주, 광주, 청주, 공주, 해주, 진주, 상주, 전주, 나주, 승주, 황주) 995년 전국을 10개 지역으로 나누는 10도제를 실시함.
● 서희와 강동6주 소손령의 요구사항 ⓛ 고구려의 옛 땅은 거란에 속한 것이니 내놓으라는 것. ② 국경을 마주하고있는 요 나라(거란)를 섬기지 않고 왜 바다건너 송나라를 섬기느냐고 말하면서 그에 대한 해명을 요구함. 이에 서희는 고려는 국호로 이미 고구려를 승계하고 있었으며 또한 고구려의 수도 평양을 국도로 정하고 있음을 내세우면서 고구려 옛 땅이 거란의 영토라는 주장에 반격하고 거란과의 외교관계가 성립되지 못한 것에 대하여 거란과 고려사이에 여진이 있기 때문에 거란을 왕래하기가 바다를 건너 는 것보다 어려운 탓이라고 해명하고 거란과 고려가 통교하기 위해서는 외교를 방해하는 여진을 쳐야 한다고 덧붙이면서 여진이 머무르는 곳에 성을 구축하고 길을 통할 수있도록 거란이 도와줘야 한다고 역설했다. ● 최승로의 시무28조 -[崔承老, 927~989] 역대 왕들에 대한 평가를 하고 성종에게 올린 상소문. 본관 경주. 시호 문정. 12세 때 왕 앞에서 논어를 암송하여 칭찬을 듣고, 안마와 예식 20석을 하사 받았으며, 원봉성 학생이 되는 은혜를 입었다. 학문연구에 전심, 일찍 문병을 관장하고 982년 왕명에 따라 사회개혁 및 대중국관의 시정 등에 관 한 시무책 28조를 올려 군제의 개편, 과다한 불교행사의 중지,무역의 절제, 지방관제의 확정,관복의 제정, 승려의 횡포 엄금, 공역(貢役)의 균등, 우상 철폐, 신분제도의 확립 등 전반적인 면에 걸쳐 폐 단을 시정, 새로운 제도를 제정 ·건의하여 고려왕조의 기초작업에 큰 역할을 하였다. 특히 토호들의 횡포로 인한 세공 수납의 폐해를 시정토록 12목을 설치, 목사를 상주시켜 중앙집권 적 체제를 갖추도록 했다. 988년 문하수시중 에 승진하고 청하후에 봉해졌다. ■ 제7대왕 목종 980년-1009년. 재위기간 997년-1009년. 11년 18세에 즉위함.
●동성연애자 목종의 나약한 정치와 강조의 반란.
18세의 어린 목종이 집권하자 왕권은 그의 모후 헌애왕후가 차지하게 된다. 유난히 정권욕이 강했던 헌애왕후는(경종비) 김치양과 부부의 연을 맺고 그들의 소생으로 왕위를 이으려는 음모를 꾸미게 되고, 왕권을 상실한 목종은 도탄에 빠진 나머지 남색을 즐기며 정치를 외 면한다. 이에 따라 조정이 척촉과 권신들 손아귀에서 놀아나면서 고려는 점점 혼란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목종은 경종이 사망할 당시 두 살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왕위는 성종에게로 이어졌다. 하지만 아들이 없던 성종은 송을 궁중에서 양육하여 990년 개령군에 봉했다. 성종이 죽고 목종이 즉위하자 헌애왕후가 섭정을 실시한다. 정권을 거머쥔 헌애왕후는 자신의 정부인 김치양을 불러 들 인다. 김치양은 성종대에는 천추궁에 출입하면서 헌애왕후와 정을 통하다가 발각되어 장형을 당하 고 귀양 중에 있던 상태였다. 김치양을 불러들인 헌애왕후는 스스로를 천추태후라 부르도록 하고 정사를 마음대로 주므르고 김치양과 부부행세를 하며 아들까지 출산한다(1004년). 김치양은 우복야겸 삼사사에 오르고 인사권을 장악하여 백관의 임명권을 손아귀에 넣었다. 이렇게 되자 벼슬을 원하는 자들로 그의 집은 문전성시를 이뤘고 뇌물이 엄청 들어왔다.
목종은 이런 김치양을 내쫒기 위해 여러 가지 방책을 강구하지만 헌애왕후로 인해 번번이 실패한다. 이렇게 되자 목종은 동성애를 하고 그 대상은 유행간이며 유행간은 합문사인의 벼슬에 오르게 되고 항상 목종 곁에서 정사를 농단하기 시작한다.목종은 정사에 관한 한 유행간에 묻지 않은 것이 없었 고 유행간은 마음먹은 일이면 언제든지 왕을 조정하여 이룰 수있었다. 유행간은 또 유충정 이라는 인물을 목종에게 소개해줬고 조정은 점차 유행간과 유충정에 의해 좌지우지 되었다. 당시 태조의 유일한 혈통은 안종왕욱과 헌정왕후의 불륜의 씨앗인 대량원군(현종) 뿐이었다. 헌애왕후의 친동생인 헌정왕후는 경종이 죽은 후에 사가에 머물다가 왕욱과 눈이 맞아 아이를 낳았 고 이를 알게 된 성종은 왕욱을 귀양 보냈다. 그후 헌정왕후는 혼자서 아이를 출산하다가 산욕으로 죽고 아이는 성종에 의해 대궐에서 양육 되었다. 이 아이가 바로 대량원군(현종)이다. 1009년 목종이 병으로 눕자 헌애왕후와 김치양은 대량원군을 죽이기위해 혈안이 되었고 조정은 더 욱 엉망진창으로 변해갔다. 왕 곁에는 항상 유행간과 유충정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고 그들의 측근 을 제외한 다른 신하들은 왕의 얼굴조차 볼 수없었다. 목종은 좀처럼 편전에 나가지 않았으며 만나 기를 청하는 신하가 있어도 결코 만나 주지 않았다. 따라서 유행간과 유충정의 입에서 흘러 나오는 말은 모두 왕명이라는 이름을 달았다. 목종은 임종이 가까워지자 한시바삐 후계자를 결정코자 하였다. 후계자 자격을 갖춘 유일한 혈통은 대량원군 왕순 뿐이었다. 하지만 유행간이 왕순에게 선위하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에 목종은 은밀히 채충순과 최항을 불러 차기 왕에 대해 의논하고 황보유의를 신혈사로 보내 대량원군을 데려오라고 명령하였다. 또한 전중감 이주정이 김치양 일파이기 때문에 그를 서북면 순검부사로 파견하고 동시 에 서경 도순검사인 강조를 불러들였다. 강조가 왕명을 받고 용천역에 도착했을 때 최창이 찿아왔다. 그들은 왕의 병세가 악화되어 이미 위 독한 상태이기 때문에 헌애왕후와 김치양이 왕명을 날조하여 북방의 군사권을 쥐고 있는 강조를 소 환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때 헌애왕후는 강조가 개경으로 돌아오면 자신들의 계획에 차질이 생 긴다는 생각에 도중에서 그를 생포하기로 결정하고 군대를 배치해둔 상태였다.그 사실은 곧 강조의 아버지에게 전해졌고 그는 급히 사람을 시켜 왕이 이미 죽고 없으니,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국난을 평정하라는 편지를 보냈다. 이에 강조는 병력 5천을 인솔하고 평주에 도착해서야 왕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강조는 병사를 이끌고 온 것을 후회 했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고 부하 장수들의 건의에 따라 목종을 폐립할 것을 결정했다. 강조는 목종을 폐위시키고 대량원군을 왕으로 세우고 김치양부자와 유행간등 7명을 죽이고 그 도당 과 헌애왕후의 친족 이주정등 30명을 귀양 보냈다. 목종은 강조가 사람을 시켜 사약을 먹도록 강요했는데 목종이 이를 거부하자 강조의 부하들이 목종 을 살해하고 자살한 것처럼 꾸몄다. 이때 목종의 나이는 30세였다. 이같은 강조의 역모사건은 현종 즉위 후 거란이 고려를 침범하는 빌미가 되었다.
■ 제8대왕 현종 실록 992년-1031년. 재위기간 1009년-1031년 22년 18세 즉위.
● 수난을 먹고 자라난 군주 현종과 고려의 국력신장. 당시 태조의 유일한 혈통은 안종왕욱과 헌정왕후의 불륜의 씨앗인 대량원군(현종) 뿐이었다. 헌정왕후는 경종이 죽은 후에 사가에 머물다가 왕욱과 눈이 맞아 아이를 낳았고 이를 알게 된 성종 은 왕욱을 귀양 보냈다. 그 후 헌정왕후는 혼자서 아이를 출산하다가 산욕으로 죽고 아이는 성종에 의해 대궐에서 양육 되었다. 이 아이가 바로 대량원군(현종)이다. 헌애왕후가 대량원군 왕순을 죽이기위해 자객을 보내고 독이든 술과 음식을 먹이도록 강요하기도 하였다. 그 때마다 왕순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고 죽음의 공포에 떨며 몇 번에 걸쳐 목종에게 편지를 썼다. 그러나 그의 편지는 유행간에 의해 곧잘 중간에서 사라지곤 하였다. 하지만 대량원군 왕순을 차기 왕으로 앉혀야 된다고 생각했던 유충정이 그의 편지를 왕에게 전달함으로써 다행히 위 기 상황을 전할수가 있었다. 목종은 김치양이 왕위를 노리고 있다는 것도 유충정을 통해서 전해들은 상태였다. 그래서 충주부사 로 있는 채충순을 은밀히 불러 왕순의 편지를 보여 주며 한시바삐 신혈사로 가서 왕순을 대궐로 데 려 오도록 하는 한편 서경 도순검사로 있던 강조를 도성으로 불러들여 병권을 안정시켜 도성의 안 정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강조는 왕의 명령이 헌애왕후에 의해 조작되었다고 생각하고 김치양 일파를 제거하기위해 군사 5천을 이끌고 개경으로 향했다. 서경을 떠날 때 강조는 이미 김치양 일파에 의하여 왕이 살해 됐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경기도 평주에 이르렀을 때 왕이 살아 있다는 말을 듣고 머뭇거리게 된다. 하지만 군사를 이끌고 와 반역으로 몰릴 것이 뻔한 처지에서 선택의 길은 한가지 뿐인 궁궐로 향해 말을 달렸다. 강조의 군대는 순식간에 궁궐을 장악했다. 궁궐을 장악하자 추종자들이 그를 왕으로 세우려 했지만 그는 거부했다. ● 거란의2차침입 동여진의 고변으로 목종 폐립의 내막을 알게 된 거란은 1010년 7월 급사중량병과대장군 나률윤을 파견하여 목종 살해사건의 진상을 밝힐 것을 요구 하였다. 이에 따라 진적과 윤여를 거란에 파견하 여 목종 폐립사건의 양해를 구하였으나 거란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해 10월 거란 왕은 40 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로 진군 하였다. 거란은 항복을 종용 하면서 목종을 죽인 강조를 거란에 압송하면 회군 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고려가 이를 거부하자 거란군과 고려군 사이에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고려는 반격을 개시했지 만 역부족으로 한 달만에 서경을 내주고 거듭 후퇴해야 했다. 그리고 이듬해 1월 거란은 개경까지 밀어닥쳐 궁궐을 소각하고 민가를 모조리 불살랐다. 이때 현종은 경기도 광주에 머물러 있다가 거 란이 남아해옴에 따라, 장곡과 태인을 거쳐 노령산맥을 넘은 다음 나주로 몸을 피신했다. 거란이 퇴각하자 현종은 전주 공주를 거쳐 2월 중순 경 개경으로 돌아왔다.
※태조왕건은 후대 왕들이 경계해야할 10가지를 남겼는데 훈요십조 중 제8조 차령산맥이남과 공주 강 밖은 산형지세가 다같이 배역인심의 땅이므로 벼슬을 주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 후대 학자 들은 이것이 경주 최씨 세력들에 의해서 조작됐다고 하는데 이런 내용들이다.
일찌기『고려사』태조편이 편찬되었지만 현종 시대 거란의 2차 침입(1010년-1011년)때 모두 불타고 없어졌다.그래서 태조가 죽은지 80년이 지나서 『고려사』를 다시 편찬했다. 이때 최제안 이라는 인물이 (최승로의 손자) 최항의 집에 간직해 두었던 문서를 가지고와서 왕건의 유서라 하며 실록에 끼워 넣었다. 『고려사』열전 편. 최항은 경주 황룡사의 중창을 주장하고 이를 수행한 인물로써 신라의 후예였다. 최제안은 고려초기 중신이었던 최승로의(성종때 시무28조) 손자이며 최승로는 경주출신으로 신라에서 고위벼슬을 지낸 최 은함의 아들이다. 이미 불타고 없었던 훈요십조가 80년의 세월이 지난 뒤에 복원되었고 이를 주도 한 사람들이 신라구신의 후손이라는 점에서 훈요십조의 진위가 의심스럽다. 왕실의 중요한 문서가 어떻게 사가에 보관되어 있었겠는가 ? 호남세력은 왕건이 죽은 뒤 정종,광종대를 거치면서 황주의 황보씨집안과 충주유씨집안, 경주세력등 의 따돌림을 받아 몰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종이 거란에 쫓겨 나주로 피신하면서 새로운 기회 를 잡는다. 신라계 인물들은 주로 문반 이었으므로 쫓기는 현종을 보살피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거란이 강조 를 죽이고 물러난 뒤 현종이 개경에 돌아오기까지 두 달 동안 호남사람들의 접대는 어린 나이의 현종 에게는 깊은 감명을 주었다. 전주에서 박온의 딸을 얻고 훈요십조에서 배역의 땅으로 지목한 공주 강 나루터에서 김은부는 세 딸을 현종과 동침시켜 개경에 남아있던 경주계 권신 최항 등을 당 황스럽게했다. 김은부의 맏딸인 원성왕후가 제9대 덕종과 제10대 정종을 얻고 둘째 딸인 원혜왕후 김씨가 11대왕인 문종을 낳는다. 최항은 채충순과 모의해서 김치양을 역적으로 몰고 목종까지도 몰아내는 등 경주 김억렴의 외증손 인 현종을 왕위에 올려 놓은 장본인이다. 최항과 같은 집안인 최제안은 현종을 만나 태조께서 후대 왕들이 명심할 「훈요십조」를 남긴 바 있는데 그 「훈요십조」가 최항의 집에 있어 가져 왔다고 내비친 바 있다. 이 경위는 현종 때 편찬한 고려사에 나온다. 그러나 최항이 거란의 침입을 겪은3년 뒤 새로 짖는 국사의 감수국사를 맡아 적어 넣었다는 데서 의심이 간다. 최항 등은 강조가 거란의 성종에 의해 살해된 뒤 현종이 돌아오자 강조와 더불어 현종을 옹립하는데 공을 세운 전남출신 위종정,박승종, 탁사정 등을 해도로 유배 시켜 버렸다. 그리고 경주출신 최치원과 설총을 문묘에 배향하고 경주를 동경으로 승격시켰으며 「훈요십조」의 권위를 보완할 목적으로 도선을 대선사로 추봉하는 조치를 취했다. 학계일각에서「고려사」가 편찬된 시기와 배경을 두고 위작가능성을 제기하는 것은 위와 같은 이유 에서다. 일본인 사학자 금서룡은 위작의 주동인물로 최항과 최제안을 꼽고 있다.
● 거란의3차침입
1018년 12월 소배압이 이끄는 거란군 10만이 다시 침략을 강행하는데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 주력 부대가 거란군의 후방을 교란하며 압박을 가해오자 전세가 불리함을 느낀 소배압은 퇴각하기로 결 정한다. 그러나 고려군에 의해 구주에서 거의 몰살당하고 말았다. 1019년 2월 벌어진 이 전투가 그 유명한 귀주 대첩이다. 현종대의 국력강화에 힘입어 고려는 13세기까지 거란, 여진 등과 평화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하며 안정을 지속 할 수있었다. 이제현은「고려사」에서 현종의 치 새를 이렇게 평가하고있다. " 군자는 나라를 잘 다스릴 때에도 환란에 대한 경각심을 잊지 않아야하며 편안한 때도 위태로움을 생각하여 시종일관 삼가는 마음을 늦추지 않음으로써 천도를 받든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나는 현 종 에게 아무런 흠집도 찾을 수가 없구나 라고 기록됐다" 중국에서는 송과 거란이 세력팽창을 위해 계속해서 서로를 공격함. 송나라에서는 화약과 나침판이 발명됨.
■ 제9대왕 덕종 1016년-1034년. 재위기간 1031-1034년. 3년. 16세-19세.
● 덕종의 짦은 치세와 오래 기억된 德 16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덕종은 나이답지 않는 너그러움과 섬세함을 바탕으로 평민한 정치 를 펼쳐 나가지만 병약한 탓으로 왕위에 오른지 3년 여만에 생을 마감한다. 덕종은 현종과 마찬가지로 거란에 대해 강경한 자세를 유지하면서 정권다툼으로 밀려난 거란인들을 받아들여 그들의 정국을 진단하고 내부사정을 분석하기도 했다. 현종대의 두 번에 걸친 대대적인 외침 속에서 국력을 한층 신장시킨 고려는 덕종대에는 군사적으로 강성했을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매우 안정되어 있었다. 성종 대이후 꾸준히 성장한 과거출신 신진 관료들이 바로 이러한 정치의 안정적 기반이었다.
■ 제10대 정종 1018년-1046년. 재위기간 1034년-1046년. 11년. 17세-28세.
● 정종의 실리정책과 고려의 안정 정종 대에는 거란과 화의모색으로 거란의 연호를 사용한다. 이로써 고려와 거란의 대치관계는 일단 락 되고 이후부터 거란이 멸망하는 13세기까지 양국간의 평화는 지속된다. 1044년 압록강 어귀에서부터 동해안의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완성한다. 이같은 국력의 증대 는 고려사회를 외침에 대한 근심으로부터 벗어나게 함으로써 내부 기강확립에도 많은 도움을 준다. 1039년에는 奴婢從母法 을 제정하고, 1045년에는 악공과 잡류들의 자손들이 과거에 진출 하는 것 을 금지시켰으며 1046년에는 장자상속법을 마련하는 등 정종은 변방의 안정을 바탕으로 일련의 사 회의 안정책을 실시한다. 정종은 5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4남 1녀의 자녀를 얻는다. 선대 왕들과는 달리 모두 혈연관계가 없는 족외혼이라는 것이 특징이다.이는 정종의 왕권이 비교적 강력하지 못했으며 신하들의 입김이 그 어느 때보다 크게 작용 했다는 의미이다.
■ 제11대 문종 1019년-1083년. 재위기간 1046년 1083년 37년간. 28세-65세.
● 성군 문종과 고려의 태평성대 정종시대에 마련된 안정을 기반으로 문종은 정치.사회.문화.외교.학문등 모든 분야에 걸쳐 획기적인 발전을 일궈 낸다. 37년이라는 장구한 세월동안 지속된 이러한 발전은"고려의 황금기"를 열게 되고 이에 따라 고려문화의 대외적위상은 한층 격상된다. 최제안의 후임으로 최충을 시중에 앉히면서 본격화되어 왕총지 이자연등의 재상들을 거치면서 한층 무르익는다. 1071년 문종은 신하들의 강력한 만류를 저지하고 민관시량 김제를 송에 파견함으로써 고려와 송은 다시금 정상적인 국교관계를 맺었다. 송은 당시 고려와 힘을 합해 거란을 압박하고 과거의 영토를 회복 하고자 하였고 고려는 송을 통해 거란을 견제하는 한편 그들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문화 부 흥을 꾀하고자 하였다. 동시에 거란과 외교관계를 끊지 않음으로써 고려는 북방의 안정을 유지 시 켰다. 문종 대에는 정치와 외교의 안정과 더불어 학문적으로도 대단한 발전이 있었다. 학문을 주도한 인물은 최충이었다. 그는 일흔이 되자 스스로 퇴직을 신청한 후 사립학교를 설립하 여 인재양성에 총력을 기울였다. 문종은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많은 재력을 동원하여 흥왕사를 창건하였는데 이 절은 1055년 에 공사가 시작되어 약 13년만에 완성되었으며 총 2천8백 칸의 규모로 대궐의 크기와 비슷했다고 한다. 금144근 은427근을 들여 금탑을 조성하기도하고 절 주변에 성을 쌓아 재난시에 방어벽을 구 축할 수 있도록 했다. 계행이 청정한 1천명의 승려가 머물렀던 흥왕사는 문종 대이후 고려불교의 중심지로 성장했으며 숙종 대에는 흥왕사 금탑에 송나라에서 보내 온 대장경을 보관하기도 했다. 성종 때 폐지된 연등회, 팔관회를 공식적으로 부활시키고 많은 불교행사를 치렀다. 또한 스스로 청정한 생활을 하며 매월 세 번 이상 꼭 절을 찾아 기도를 하면서 백성들의 불심을 자 극하여 민심을 안정시켰다. 문종은 세 아들을 출가시켰는데 그중 하나인 대각국사 의천에 의하여 천태종이 도입되어 대대적인 불교 운동이 일어난다. 이는 당시 대신들은 대개 유학에 몰두하였는데 대게 유학에 몰두하였는데 유학의 지나친 부흥으로 대신들의 힘이 강화되는 것을 방지하고 민심을 하나로 통일 시키기 위해서는 불교를 융성시키는 것 보다 좋은 방책은 없었다. 문종은 철저한 법치주의를 주장하며 법제 확립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만 곧잘 예외를 인정하고 고도의 정치력을 발휘하는 포용력이 있는 왕이기도 했다. 대신들의 논리가 옳다고 판단될 때는 과 감하게 자신의 고집을 꺾는 군자다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또한 무서운 추진력을 보이기도 했는 데 불교융성책과 흥왕사 창건 그리고 송나라와의 국교 정상화 등의 문제가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이러한 문종의 정치적 넓이와 인격은 고려사회를 건국이래 최고의 황금기로 끌어 올렸다. 문종은 이자연의 세 딸을 맏이 하였으며, 그중 인예왕후 이씨에게서 10남2녀를 낳았으며 12대순종, 13대선종,15대숙종,대각국사 의천등이 있다. 인경현비 이씨가 3남을 낳았으며 총13남 2녀를 얻었다.
● 대각국사 의천 - 천태종의 창사자 (1055년-1101년) 그는 총명하고 지혜가 뛰어나 짧은 시간에 화엄경을 통달하였고 학문을 좋아해 홀로 유학에 쉼취 하여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다. 송나라에 유학을 결심하나 문종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고 문종 사망 후인 1085년 4월 그는 모후에게 한 장의 편지만을 남긴 채 유학길 에 오른다. 송 황제 철종은 그를 환대하고 계승사에 머물도록 하는 한편 화엄의대가 유성법사를 소개해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정원법사를 만난 의천은 화엄경, 능엄경, 원각경, 기신론 등의 사상에 대하여 논하고 천태사상과 현수의교학에 대해서도 배우게 된다. 의천과 중국학자들의 토론이 지속되는 가운데 의 천의 귀국을 청하는 선종의 국서가 송나라로 날아들었고 모후 인예왕후의 간절한 염원으로 의천은 유학 1년만에 불경 3천여권을 싣고 귀국한다. 그 후 그는 흥왕사의 주지가 되어 천태학을 정리하고 제자를 양성했다. 흥왕사에 교정도감을 설치하여 이들 경서를 간행했다.「의천목록」4740권의 책이 간행되는데 이를「고려속장경」이라 한다. 경전 간행작업을 마친 의천은 숙종 2월에 국청사가 완성 되자 그 곳 주지가 되었으며 이때부터 본격적인 천태교학을 강의하기 시작하는데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 전국에서 모여든 고승이 무려 천명이 넘었다. 의천은 이를 바탕으로 1099년 천태종을 개창 하게 되고 이로써 천태종은 명실공히 하나의 공증된 종파로 자리하게 된다.원래 화엄경에 몸담았던 의천이 천태종으로 개창한 것은 천태사상의 핵심인 회삼귀일 일심삼관의 교의가 선종과 교종의 화 합을 도모할 수 있는 유일한 사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선종이 도입된 신라이후 선종, 교종은 서로 대립적 양상을 띠고 있었는데 의천이 볼 때 이는 국가의 기반을 뒤흔들 수있는 요소로 비춰졌 다. 따라서 의천은 천태 사상으로 선종, 교종의 화합을 이뤄 국론을 통일 시키고자 했다. 의천의 이 같은 노력에 힘입어 많은 타종단 승려들이 천태 사상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 결과 천태종은 고려 사회에서 가장 조직력이 뛰어난 종단으로 성장한다. ● 문종시대를 이끈 양대산맥
● 동방의 귀공자 최충(984년-1068년).- 해주 최씨. 22세에 문과에 장원급제 하여 우습유에 올랐으며 1013년 에 황주량등과 「칠대실록」편찬 작업에 수찬관으로 참여 하였다. 그 후 한림학사,예부시랑,간의대부,형부상서등을 역임하고 문종즉위 후에는 평장사로 있다가 곧 문하시중에 임명됨. 죄수에 대한 심문을 할 때에는 반드시 형관 3인이 함께 들 어가도록 하는 삼원신수법이 마련되었다.일흔이 넘자 스스로 청치일선에서 물러난 최충은 육영사업 에 몰두해 총9개의 서재로 이뤄진 「구재학당」을 세움으로써 최초의 사립학교 설립자가 되었다. 「구재학당」설립으로 많은 제자를 길러 내자 고급관료 출신 학자들이 대거 사립학교를 세우기 시작 했다. 그 결과 개경에 12학당이 생기는데 그것을 일러 사학십이도라 하였다. 사학십이도 중 으뜸은 최충의 문헌공 학도였다. 최충의 시호를 따라 붙여진 이학도의 수는 수백명에 이르렀고 이들 주도 하에 개경 뿐아니라 지방에까지 대대적인 유학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이러한 유학열풍을 일으킨 장본인인 최충의 흔적이 흡사 중국의 공자에 비견된다 하여 "해동공자"라는 별칭이 붙는다. ● 문종의 오른팔 이자연(1003년 1061년) - 경원이씨. 1003년에 태어난 그는 당시 권문세가였던 현종의 장인 김은부의 처조카였기에 이미 막강한 정치 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1024년 3월 과거에 장원급제 하였으며 1031년 우보궐이 되었다. 이부낭중,어사잡단, 우승선을 거쳐 지중추원사, 중추부사등을 지내다가 1050년 평장사에 올라 정계 의 핵심 인물로 부상한다. 내사사랑평장사에 오른 그는 문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는다. 그리고 세딸 을 모두 문종에게 시집보냄으로써 조정의 실세가 된다. 그의 큰딸이 1052년에 정식으로 왕비에 책 봉 되면서 그는 문화시랑평장사를 거쳐 1055년에는 최충의 뒤를 이어 재상직인 시중에 오른다. ■ 제12대 순종 1047년-1083년. 재위기간 1083년. 3개월
● 순종의 병상 3개월 치세 순종은 문종의 장남이자 인예왕후 이씨 소생으로 1047년에 태어났으며 8세 때인 1053년 2월에 태자에 책봉되었다가 1083년 7월 문종이 죽자 37세의 나이로 고려 제12대 왕에 올랐다. 그는 원래 병약한 몸인데 문종이 죽자 그 슬픔과 상중의 피로함을 이기지 못하고 육신이 더욱 약해 졌다. 그 바람에 재위 3개월만에 임종을 앞두는 신세가 됨으로써 고려 34대왕 중 재위기간이 가장 짧은 왕이 되었다. ■ 제13대 선종 1049년-1094년. 재위기간 1083년-1094년. 10년
● 선종의 중도정치와 고려 문화의 융성 순종이 즉위 3개월만에 생을 마감하자 친동생인 선종이 왕위를 이었다. 선종은 문종의 둘재 아들 이자 인예왕후 이씨 소생으로 1049년 9월 경자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경사에 밝고 제술에 뛰 어나 1056년 3월 국원후에 봉해졌으며 상서령에 제수된 뒤 순종 때 수태사중서령이 되었다. 순종1년(1894) 승과를 설치하고 불교를 장려하였으며, 순종2년(1085) 동생인 의천이 몰래 송에 건 너가 불법을 공부하고 2년 후에 돌아왔다. 선종시대의 정치는 불교와 유교의 균형적인 발전을 토대 로 매우 안정되었으며, 외교에서도 거란을 포함한 송, 일본, 여진 등과 광범위한 교역을 추진하였다. 1094년 2월 열병하고 5월에 연녕전에서 죽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공손하고 슬기로웠으며,자라 서는 효도하고 공손하고 검소 하였으나 놀이에 절도가 없고, 사탑을 많이 세워 백성들의 과중한 노 역으로 인한 원망이 많았다 한다. 능은 개성에 있는 인릉이며, 시호는 사효 이다
● 근친혼의 금지 선종2년(1085)에는 이복남매가 결혼하여 낳은 자식은 벼슬에 오르는 것을 금하였다. 근친혼이 규제 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가 건국 된지 160여 년이 지난 문종때부터였다. 1058년(1058)에는 대공친인 사촌끼리 결혼하면 그 자식이 관리가 될 수 없게 하였다. 선종2년의 이러한 조치는 바로 이러한 연 장선상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금지조치가 취해진 이유는 고려사회에서 유학이 통치 이 념으로 정착되면서, 중국에서 동성근친간의 결혼을 철저히 금지하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실제로 문종이후에는 왕실에서도 남매간의 결혼 사례가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국가는 이러한 금지 규정을 실천하는데 앞장섰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랜 근친혼 풍습으로 인해 고려에서는 중국처럼 동성의 결혼을 금지하는 규정을 철저 하게 시행할 수 없었다. 중국과 달리 고려에서는 결혼당사자를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서 낳은 자식을 학교에 입학하지 못하도록 하거나, 관직에 나갈 수 없게 하는 등 간접적 처벌을 하였던 것 이다.
● 거란의 각장 설치문제 목종8년(1005) 국경무역의 장소인 인무군(振武軍)과 보주(保州)에 각장(?場)이 개설됨으로써 양국간 의 경제적인 접촉에 획기적인 진전을 보았다. 그러나 강동6주에 대한 거란의 환부강요는 고려의 반 감을 자아내어 각장무역의 폐지를 야기시켰다. 하지만 유목생활을 하는 거란족은 고려의 물자가 필 요하였고 각장무역에서 얻는 이익에 관심이 높은 거란은 송에 대해 각장설치의 확대를 요구하였고, 고려에는 각장설치의 재개를 요구해왔다. 요의 도종은 각장이 폐지된 지 거의 80년이나 경과한 선 종3년(1086)에 압록강변에 각장개설을 제의해왔다. 고려는 이에 반대하였다. 거듭된 고려의 각장철 회 요구에도 불구하고 거란은 이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고려는 중추원부사 이안(李顔)을 귀주 로 보내 국경의 정황을 살피며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였다. 그 해 9월 다시 거란에 사신을 파견해 각정 철회를 요구하자, 결국 거란은 승복하고 말았다.
고려의 압록강 경계에 대한 끈질긴 감시와 요구로 거란은 어떠한 시설물도 설치할 수 없었으며 이로써 양국 사이에는 고려의 의도대로 거란 멸망 때까지 각장이 개설되지 않았다. 이로써 고려와 거란간의 각장설치는 목종8년(1005)부터 2차 침입이 시작된 현종 원년(1100)가지 약 5년간 존속된 것으로 이해된다. 거란의 각장 포기는 고려의 거란에 대한 경계심을 완화시켜주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 선종시대의 정치는 불교와 유교의 균형적인 발전을 토대로 매우 안정 되었으며 외교에서도 거란 을 포함한 송, 일본, 여진 등과 광범위한 교역을 추진하며 주도권을 행사하였다. 거란에 대해서는 강경자세로 송과는 가까이 함으로써 고려가 문화를 존중하는 국가임을 과시하고 일본과 여진 등에 대해서도 강경책과 유화책을 고루 실시하여 어느 한쪽에 편중되는 일이 없었다.
■ 제14대 헌종 1084년 1097년. 재위기간 1094년-1095년. 1년.
● 나이 어린 헌종의 즉위와 왕위를 노리는 사람들 헌종은 선종과 사숙왕후의 소생으로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다. 11세의 헌종은 유아시절부터 당뇨병에 시달려 매우 병약했으며 병상에 누워 있어야 하는 처지였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대신들은 왕권이 선종의 동생들 중에 한 명으로 넘어갈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 데 선종이 자신의 병약한 아들에게 선위해 버린 것이다. 짐이 부왕의 유업을 받들어 외람되게도 왕 위에 올랐더니 나이가 어리고 몸이 허약한 관계로 나라의 권신들을 옳게 통솔하지 못하였고 인민들 의 기대에 보답하지 못하였다.그리하여 음모와 책동이 전략가들에게 겉잡을 수없게 일어나며 역적 난신들이 대권을 자주 침범하였다. 이는 다 내가 덕이 없는 까닭이다. 임금 노릇 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늘 생각하고 있었다. 내 생각에는 나의 숙부 계림공에게로 대세가 기울어져서 신인들이 모두 그를 돕고 있는 듯하니 너희 대중들은 그를 받들어 국가의 위업을 맡게 하라. 나는 후궁으로 물러 앉아 남은 여생이나 유지 하겠다. 즉위 초에도 이미 헌종은 허수아비에 불과했고 백관 등 역시 그 를 왕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후궁으로 물러앉은 헌종은 1097년 2월 흥성궁에서 14세의 어린 나이 로 생을 마감 마감한다. 병명은 소갈증 이었지만, 그의 죽음을 재촉한 것은 왕위를 찬탈한 숙종에 대한 두려움 이었을 것이다.
■ 제15대 숙종 1054년-1105년. 재위기간 1095년-1105년. 10년.
● 어린 조카를 몰아내고 즉위한 숙종의 10년 통치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기질이 강하여 매사에 과단성 있는 인물이었다. 또한 오경자사 등 많은 서적을 읽어 학문에 밝았고 이 때문에 문종의 총애가 남달랐다. 문종은 어린 그에게 "후일에 왕실 을 부흥시킬 사람은 아마도 네가 될 것 같구나" 라고 말했을 정도로 그를 아꼈으며 1065년 그를 계림군에 책봉했다. 1094년 조카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수태사경 상서령에 올랐고 이듬해 소태보와 왕국모의 도움으로 외척 이자의 세력을 몰아낸 다음에는 중서령에 올라 왕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그리고 그해10월 측근세력이 전혀 없는 어린 헌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함으로써 고려 제15대왕 에 올랐다. 이때 그의 나이는 42세임. 숙종은 왕권을 장악하자 곧 반대세력을 완전히 숙청하고 왕위에 오르던 날에도 친인척을 귀양 보냈 다. 숙종은 이처럼 처음부터 매우 강한 인상을 풍기며 측근세력을 중심으로 강력한 왕권을 형성 하 고자 하였다. 정치, 외교는 전번기에는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으나, 후반기로 가면서 여진족의 국력 강화에 따라 불안이 가중되고 있었다. 하지만 숙종대의 정치는 전체적으로 안정궤도를 유지하고 있 었고 그 덕택으로 주목할 만한 문화적 성과를 남긴다. 1096년에는 6촌이내의 혼인을 금지하게 되는데 이는 유학자들의 입김이 강해지고 있었음을 의미한 다. 고려 왕실은 광종이후 지속적으로 성골왕족을 중심으로 왕권을 안정시키고 있었다. 그러므로 자연히 6촌이내의 족내혼이 성행하게 되었는데 이에 대해 유학을 숭상하던 유림들은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윤리를 중시해서 숙종대의 6촌 이내의 결혼이 금지되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유림들의 힘이 강성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족외혼을 권장하던 송나라의 입김도 한껏 작용 했을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뿐만 아니라 왕실에서도 별로 지켜지지 않았다.
유학의 진흥책과 함께 원효와 의상을 국사로 추정하고 그들의 공덕을 새겨 동방의 성인으로 높임 으로써 불교의 진흥을 꾀하기도 하였다. 문화적 업적 이외에 군사적으로는 기마병 중심의 여진에 대항하기위해 별무반을 조직하게 된다. 윤관의 주장으로 설치된 별무반은 기병으로 구성된 신기군과 보병으로 구성된 신보군, 승병으로 구성된 항마군이있었으며 고려는 이를 별무반을 통하여 여진정벌을 추진한다. 숙종 대에는 이와 같이 정치, 외교적으로 전환기에 놓였기 때문에 한편으론 안정되고 또 한편으론 불안이 가중되는 시기였다. 숙종은 이런 정세 속에서 왕권을 강화시키고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 하다가 1105년 고구려 동명왕의 묘역에 제사를 지내고 돌아오는 길에 병을 얻어 결국 환궁 하지 못하고 개경으로 들어오는 노상의 수레 안에서 52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 해동통보-1102년 제조된 우리나라 최초의 화폐. 1만5천관 을 주조하여 양반과 군인들에게 분배.
■ 제16대 예종 1079년-1122년. 재위기간 1105년-1122년. 16년. 17세 즉위.
● 예종의 영토확장 노력과 여진의 성장 여진의 성장이 가속화되고 거란의 힘이 약화되자 그 틈을 이용하여 서쪽으로는 거란에게 내주었던 압록강 변의 두성을 찾고 동쪽으로는 두만강으로 진출하려는 생각을 한다. 이러한 영토확장 계획은 2년뒤 출병을 통하여 구체화된다. 1107년 10월 고려조정은 여진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국경경비군관의 보고에 따라 선제공격을 결정하고 17만 대군으로 여진정벌을 단행한 다. 그 해 12월 여진과 싸워 웅주, 영주, 복주, 길주 등을 장악하고 그 곳에 성을 쌓았으며 이듬해 초에 항주와 공험진에 성을 쌓고 또다시 3월에 의주, 동태진, 평윤진 등에도 세성을 쌓아 백성들을 이주 시킴으로써 고려는 동북지역에 9성을 얻게 된다. 여진은 이 9성을 회복하기위해 매일같이 싸 움을 걸어왔다. 여진은 북계의 9성을 돌려주면 고려에 곡물을 바치는 것은 물론이고 다시는 변방을 넘보지 않겠다고 했다. 고려조정은 찬반토론 끝에 조정의 대세에 따라 9성이 반환되자 여진은 고려 에게 대대손손 공물을 바치고 국경을 침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뒤 1109년 7월 철수작업에 돌입했다. 고려조정은 역모사건으로 왕규를 비롯하여 수십명이 귀양길에 오르고 그중 일부는 참형을 당하였다. 고려가 이렇게 내부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 중국 대륙에서는 여진족이 꾸준히 성장하여 1115년 금을 건국하였고 추장 아골타는 황제를 자청하면서 고려에 대해 형제지국을 맺을 것을 요 구해온다. 하지만 고려조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여진의 팽창에 따라 거란은 고전을 면치 못하자 고려에 원병을 요청해왔고 고려는 사태의 추이를 살피며 거란의 원병요청에 대한 대답을 회피하고 있었다. 거란의 야율녕은 고려에 쌀을 원조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었는데, 고려는 내원성과 포주성을 포기하면 굳이 쌀을 원조받을 이유가 없지 않 겠느냐며 두성을 고려에 양도할 것을 요구한다. 이리하여 고려는 1117년2월 거란에 빼앗겼던 내원 성과 포주성을 되찾게 되었다. 한편 서쪽으로 밀려난 거란은 고려에 공문을 보내 함께 여진을 칠 것을 강권하지만 고려는 이에 응 하지 않고 중립을 지켰다. 1117년엔 송나라에서 대성악을 들여왔는데 이것이 궁중 음악인 아악의 시초다. 급변하는 격동기 속에서 예종은 이렇듯 밖으로는 중립외교를 통하여 영토확장 정책을 실시 하고 안으로는 요순정치를 구현하며 태평성대를 꿈꾸는 왕이었다. 또한 그는 스스로가 시인임을 자처하며 어려서는 선비들과 시를 지어 화답하고 송나라의 선진적인 문화를 숭상하며 유학의 발전에 주력했으며 동시에 토속신앙과 불교를 조화롭게 발전시켜 고려문화 의 질을 한 단계 높이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예종의 정치에 대해 실록을 편찬한 한 사관은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예종은 영토를 넓히는데 뜻을 두고 변방에서의 전공을 요행수로 기대하여 적과의 혼극이 계속 되 었으며, 송나라 문화를 흠모하여 호종단(송나라 사람으로 고려에 와서 벼슬을 한 사람)을 신임하여 자못 그의 말에 미혹됨으로써 실수를 하기도 하였다."
● 예종과 순덕왕후이씨(이자겸의 둘째 딸) 와 사이에 인종이 태어남.
● 윤관의 여진정벌과 동북 9성. (? - 1111년). 파평윤씨
오랫동안 부족 단위로 분산되었던 여진은 11세기 후반에 이르러 통일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고려 숙종 때 북만주 완옌부의 추장 영가가 여진족을 통일하면서 북간도 지방으로 세력을 뻗쳐 왔 고, 뒤를 이은 우야소는 다시 남하하여 고려에 복속하여 있던 동여진을 아우르게 되자, 정주를 경계 로 고려군과 충돌하였다.이에 고려에서는 임간을 시켜 여진을 정벌하려 했으나, 오히려 크게 패하였 고, 뒤를 이은 윤관의 북벌군도 여진의 기병에 패하여 철수하였다. 기병 중심의 여진군을 보병 중심 의 고려군이 막아내기는 어려웠다. 이를 계기로 고려는 윤관의 주도로 별무반을 창설하였다. 별무반은 기병 부대인 신기군, 보병 부대인 신보군, 승병 부대인 항마군으로 구성되었다. 신기군은 문무 산관(散官)과 서리로부터 상인, 노복에 이르기까지 말을 가진 자로 편성하였고, 말을 가지지 않은 자와 20세 이상의 남자로서 과거 응시자가 아닌 사람은 신보군에 편속시켰다. 여진 토벌은 예종 때에 이르러 단행되었다. 예종 2 년 12월에 윤관을 원수로. 오연총을 부원수로 하는 17 만의 출정군은 천리 장성을 넘어 여진족의 거점인 함흥 평야와 그 이북 지방을 대대적으로 토벌하였다. 고려는 남쪽으로부터 백성을 이주시켜 이 곳을 개척하여 살게 하고 9성을 수축하였다. 새로 성을 구축한 곳은 함주에 이주민 1,948가구, 영주에 성곽 950칸과 이주민 1,238가구, 웅주에 성곽 992 칸과 이주민 1,436가구, 복주에 성곽 774칸과 이주민 680가구, 길주에 성곽 670칸, 이주민 680 가구, 공험진에 이주민 532가구로서, 이 6성 외에 이듬해에는 숭녕. 통태, 진양의 3성을 더 쌓아 이 른바 동북 9성의 설치가 완결되었다. 특히 함흥 평야의 함주에 대도독부를 두어 이 곳이 가장 요충 이 되었다. 그러나 거처를 잃은 여진족의 끊임없는 침략으로 인 한 방비의 곤란, 서북쪽 거란에 대 한 경계의 필요성 및 여진의 환부 애원으로 고려는 9성을 1년 7개월 만에 다 시 여진족에게 되돌 려 주었다. 동북9성 - 1107년 함주, 영주, 웅주, 길주, 복주, 공험진, 진양진, 통태진, 숭령진에 성을 쌓는다. 그 위치와 지역 명칭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이 곳이 여진족의 중요한 생활 터전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여진이 금나라 를 세우기전 이 곳에 살던 여진인 들은 고려에 조공을 바쳤다. 윤관의 건의에 따라 여진정벌을 위한 임시적인 군사조직인 별무반을 조직한다. 기마병을 보완하고 항마군을 신설하는 별무반. 윤관은 문종 대에 문과에 급제하여 습유보궐을 지냈고, 숙종 대에 누차에 걸쳐 승진하여 한림학사 승지에 임명되고 예종즉위 후에 정2품 평장사로 지내며 여진정벌을 준비하여 상장군으로 활약했으 며 종전 후에는 문하시중에 올랐다가 1111년 생을 마감한다.
■ 제17대 인종 1109년-1146년. 재위기간 1122년-1146년 23년 14세 -37세.
● 인종의 우유 부단한 정치와 고려왕조의 위기 예종이 죽고 14세의 어린 인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고려 조정은 권력암투의 아수라장으로 전락한다. 이 때문에 인종은 장인이자 외할아버지인 이자겸에게 왕위를 빼앗길 뻔한 위기를 맞이하기도 하고 묘청이 이끄는 서경세력과 김부식이 중심이 된 개경세력 사이에 끼어 수동적인 정치로 일관한다. ● 이자겸의 난과 고려조정의 혼란
인종이 왕위에 오를 무렵 조정은 이자겸을 중심으로 한 외척세력과 한안인을 중심으로 한 관료세력 이 서로 정권을 다투고 있었다. 예종 대에 이들은 왕의 중립정책으로 말미암아 서로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었으나 어린 인종이 즉위하자 이자겸이 권력을 독점하게 되었다. 관료세력인 한안인파를 제거하고 절대권력을 얻은 이자겸은 자신의 셋째 딸과 넷째 딸까지 왕비로 삼게 한다. 또한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문하시랑 평장사 척준경과도 사돈관계를 맺는다. 이자겸에게 왕권을 완전히 장악당한 인종은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이자겸과 척준경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인종의 이자겸 제거계획 명령을 받은 동지추밀원사 지녹연은 최탁, 오탁, 권수 등의 무장들과 의론 하여 군사를 이끌고 궁궐로 들어와 척준경의 아우 병부상서 척준신과 아들 내시 척 순을 죽이고 시체를 궁성 밖으로 내던졌다. 이에 척준경은 군사 수십명을 이끌고 궁성을 포위 하였 고 척춘경 측과 왕의 호위군사이에 일대 격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궁성세력은 수 부족으로 수세에 몰리게 되고 인종은 근신 십여명과 함께 궁궐을 버리고 산호정으로 피신하였다. 패색이 짙어지자 인종은 이자겸에게 왕위를 넘겨줄 의사를 내비쳤다. 그러나 조신들의 극렬한 반대 를 의식한 이자겸이 선위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지 못했고 그 때 이자겸의 재종형 이수가 선위를 강하게 반대하여 인종은 가까스로 왕위를 넘겨주는 사태는 모면하였다. 왕권회복을 위해 나섰던 군신들은 살해되거나 모두 유배되었고, 또한 인종은 이자겸에 의해서 사저 에 연금 되었으며 정사의 결제권을 빼앗기고 음식을 통제 당하고 행동을 제약받는 지경에 처했다. 한편 인종은 왕권을 회복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이자겸과 척준경을 이간 시키기로 마음먹고 척준 경에게 교서를 내려 이자겸을 척결하도록 명령한다. 인종이 척준경과 힘을 합치려 하자, 이자겸은 이를 감지하고 인종을 독살하려 한다. 하지만 자신의 셋째 딸인 왕비의 방해로 실패하고 다시 자객 을 시켜 왕을 살해 하려는 계획을 세웠고, 척준경은 왕이 위험하다는 전언을 받고 군사를 동원하여 이자겸과 그 일파를 제거한다. 또한 왕비로 있던 두 딸도 폐출됨으로써 이자겸의 난은 종결된다. 조신들은 이자겸을 참형에 처해야 한다고 했지만 인종은 그가 자신의 장인임을 상기시켜 유배 시키 는데 그쳤다. 그리고 이자겸을 제거한 공로로 척준경에게 공신칭호를 내리고 중서문하평장사에 임 명 한다. 이자겸을 제거한 척준경은 1127년 3월 "이자겸을 제거한 일은 일시의 공이나 궁궐을 침범하고 불 사른 것은 만세의 죄 라는" 정지상의 탄핵이 있자 암타도로 유배되었다가 곡주로 이배 되어 등창으 로 죽었다. 한편 1125년 거란의 요가 여진의 금에게 멸망당해 서쪽으로 쫓겨나고 송나라 역시 1127년 금에게 쫓겨 남으로 밀려난다. 이렇게 되자 중국 대륙의 패권은 금에게 넘어 갔으며 고려 역시 금의 위협 을 받게 된다.
● 묘청의 난과 서경세력의 몰락 1135년.
인종은 이자겸의 난이 종결된 후부터 줄곧 왕권 강화에 매진했으며 그 일환으로 서경천도 계획을 세운다. 묘청은 풍수지리에 의하여 개경이 이미 업운이 쇠진하여 궁궐이 다 탄 것이라며 왕기가 서 려 있는 서경으로 국도를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지상을 비롯한 서경세력은 서경천도론이 현실 화 될 경우 자신들이 조정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정치의 활로를 모색하고 있던 인종에게 묘청을 천거하는 상소를 올린다. 묘청은 성인이며 그의 제자 백수한도 뛰어난 인물입니다. 그러니 그에게 국가의 대사를 소상히 자문한 후에 정사를 처리 한다면 반드시 국가의 태평성대를 보장 받 을 수 있을 것입니다. 라며 대신들에게 문건을 돌려 중신들의 동의를 얻었다. 이에 인종은 묘청에게 국정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왕실의 위엄을 살리고 태평성대를 개창할 방도가 없는지 문의하였다. 그러자 묘청은 국도를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 위치를 설정해 주었다. 궁궐을 신축 하기위해 엄동설한에 엄청난 인력이 동원되어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다. 1132년 왕궁이 수축하자 인종은 서경으로 행차 하였는데 이때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고 돌풍이 불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인종은 몰고 가던 말이 놀라 엉뚱한 곳으로 달려가 진창에 빠져 버리고 호종하던 시종들은 왕의 행방을 잃고 찾아다니는 사태가 벌어졌다.게다가 그 날밤 눈발이 날려 낙타가 죽고 말과 사람 이 다치기도 하였다. 이 사건으로 묘청을 배척하는 소리가 높아 갔고 묘청을 비롯한 그 일당들을 멀리할 것 을 간언하지만 인종은 수용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조정은 묘청이 이끄는 서경세력과 김부식이 이끄는 개경세력으로 분리되어 치열한 혈전을 벌렸다. 태화궁 건설 후 잇따라 계속된 재 화 때문에 묘청의 입지는 많이 약화된 상태였다. 이에 따라 묘청을 위시한 서경세력은 극약처방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결정하고 인종에게 서경으로 행차할 것을 건의 하였다. 하지만 인종이 간관 들의 반대에 부딪쳐 서경행차를 거부하자, 1135년 정월 그들은 군사를 일으켜 서경을 거점으로 반 란을 일으켰다. 이에 김부식을 비롯한 개경세력들은 토벌군을 출동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자, 인종은 별수없이 출병을 명령했다. 그러자 김부식은 우선개경에 머무르고 있던 서경파 인물들인 정지상, 김 안,백수한 등을 처단한 후 대병력을 이끌고 서경으로 향했다. 전세의 불리함을 절감한 반란군 조광 은 항복을 결심하고 묘청, 유담, 유호 등의 목을 베어 분사대부경 윤첨을 시켜 개경으로 보냈다. 그런데 개경에 도착한 윤첨이 옥에 갇히자 조광은 항복을해도 죽음을 면하기 어렵다는 생각에 결사 항전을 명령했다. 그러나 정부군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일여년 만에 서경성은 함락되고 묘청의 난은 완전히 종결됐다. 묘청의 난이 제압되자 조정내의 서경세력은 완전히 몰락하였으며 불교세력도 상 당히 쇠퇴 하였다. 반대로 김부식을 위시한 개경 문신 귀족들이 정권을 독점하게 되자 서경 세력과 개경 문신귀족 세력의 균형이 깨어져 문신귀족이 권력을 독점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후에 이것은 곧 왕을 능멸하고 무신을 홀대하는 풍조로 이어져 무신정변의 원인이 된다.
● 김부식과 삼국사기 - 1145년. 경주 김씨 (1075년 - 1151년)
묘청의 난 때 김부식은 삼군원수로 임명되어 반란군을 토벌하였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인종의 절 대적인 신임을 얻어 문하시중에 올랐다. 김부식은 경주출신으로 신라왕족의 후예이다. 신라가 망할 무렵 그의 증조부 김위영은 왕건에 귀의하여 경주지방을 관장하는 수장이 된다. 그 후 고려가 통일 된 뒤에도 경주의 호족으로 남아있다가 김부식의 아버지 김근에 이르러 중앙정부로 진출하게 된다. 김부식의 네 형제는 모두 과거에 합격하여 매년 임금이 그들의 어머니에게 곡식을 내렸다. 맏이 부필을 제외한 부일 부식 부철은 당시 선망의 대상이던 한림직에 제수되어 가문의 영광을 얻 었다. 맏이 부필은 윤관과 함께 병마판관으로 여진정벌에 참여하였으며 둘째 부일은 벼슬이 중서 시랑문하평장사 셋째 부식은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문하시중에 넷째 부칠은 지추밀원사에 이르렀으 니 이자겸의 난 이후에 인종시대에는 이들 형제들이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때 그는 함 께 묘청의 난 을 진압했던 윤언이를 탄핵하여 좌천시켰는데, 1140년 사면령이 내려져 윤언이가 정 계에 복귀할 기미를 보이자 정치보복이 두려워 세 번이나 사직을 청하여 허락을 얻었다. 그 무렵 그 의형과 동생도 사망하고 없었고 자신의 지지세력들도 거의 탄핵을 받아 물러난 상태였기 때문에 그는 별수없이 정계은퇴를 결심했다.인종은 그의 이같은 쓸쓸한 정계은퇴를 위로하는 차원에서 8명 의 젊은 관료를 그에게 보내「삼국사기」의 편찬을 명했다. 왕명을 받은 김부식은 5년간의 작업 끝에「삼국사기」를 완성하여 인종이 죽기 2개월 전인 1145년 12월 왕에게 올렸다. 중국의 정사체로 기록된 「삼국사기」는 총50권으로「본기」28권(고구려 10권 백제6권 신라. 통일 신라 12권)「志」9권,「表」3권,「熱戰」10권으로 이뤄졌다. 「삼국사기」는 이들 편찬자들의 독자적인 저술이 아니라 고기,삼한고기, 신라고사, 구삼국사, 김대문 의고승전과 화랑세기, 계림잡전, 최치원의 제왕연대력등의 국내문헌과 삼국지, 후한서, 진서, 위서, 송서, 남북사, 신당서, 구당서, 자치통감 등의 중국문헌을 참고하여 기술 되었다.
인종시대 중국은 여진족이 금을 세워 요를 멸망시키고 남하를 계속하여 송을 굴복시킨다. 이에 따라 요는 서쪽으로 쫓겨 가고 송은 북송시대를 마감하고 남송시대를 연다. 이시기에 송나라 에서 나침판이 발명되고 대장경이 간행된다. ● 나침반(1086년, 중국) 배의 방형이나 위치를 알아보는 항해용 계측기로, 화약, 종이와 함께 중국 3대 발명품의 하나로 꼽힘. 저절로 남북방향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일찍이 발견한 중국인들은 여러 형태의 나침판을 제작, 사용하였는데 이에 관한 신뢰성 있는 기록은 11세기 이후의 문헌에서 보임 중국에서 발명된 나침판은 이후 아라비아를 거쳐 유럽으로 전래되어 폐쇄적이었던 중세 유럽의 세 계관을 타파하고 유럽인들로 하여금 밖으로 눈을 돌려 광활한 세계정복에 나서게 하는 초석이 됨. ●총(1250년, 중국) 투사체를 쏘는데 사용하는 관의 일종으로, 근대적 의미의 총기는 1040년 중국 에서 화약이 발명된 이후 사용시작. 당시에는 주로 종이 원통 안에 화살을 넣은 뒤 안에서 화약을 폭발시켜 화살을 날리는 비화창 등이 만들어졌으나, 1281년 원나라에 의해 철제포탄을 사용하는 철화포가 최초로 만들어졌고 1288년에는 대포가 등장.
■ 제18대 의종 1127년 -1173년. 재위기간 1146년-1170 24년.
● 향략주의자 의종과 환관정치와 정중부의 난 묘청의 난 이후 개경의 문신귀족들이 정권을 장악한 가운데 즉위한 의종은 왕권을 회복하기위해 친 위세력 형성에 주력한다. 이 때문에 환관과 내시들의 힘이 막강해져 그들과 간언들 사이에 치열한 힘겨루기가 전개되고 그 틈바구니에서 멸시 당하던 무신들이 반란의 기회를 엿보게 된다. 의종은 어린 시절부터 오락을 좋아하고 시를 즐겼다. 특히 격구에 몰입하여 학문을 소홀히 하고 내시나 무 장들과 어울려 함께 시합하는 일이 잦아졌다. 이 때문에 모후 공예왕후는 둘째 왕자 경을 태자로 책봉하고자 주장 하였으나 인종이 이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도 공예왕후는 끈질기게 둘째 왕경을 새롭게 태자로 삼을 것을 간청한다. 이에 인종도 마음이 통하여 그를 폐립할 생각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인종의 신임이 두터웠던 예부시랑 정습명이 태자 폐립을 반대하며 자신이 의종을 보 필하여 정사를 원만히 수행할 수있도록 하겠다고 자청한다. 의종이 왕이 된 이후에 정습명에 의해 철저하게 행동을 규제 받는다. 정습명은 너무 지나치게 왕의 행동을 규제하는 바람에 의종이 점차 그를 꺼리게 된다. 그리고 급기야 의종은 환관과 내시들을 중심으로 자신의 근위 세력을 형성하여 김존중, 정서등을 측근으로 삼아 자신의 행동을 지나치게 규제하는 정습명을 정계에서 축출하여 죽 여 버린다. 의종은 시를 잘 짓는 내관들과 악공들을 데려놓고 밤새도록 주연을 즐기는 일도 잦았다. 의종은 호위병들의 고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의 3일에 한 번씩 연회를 배풀었고, 이에 호위병들 의 불만은 점차 고조되었고 마침내 반란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 환관정치의 주역 정함과 그 주변 인물들
정함 [?~?] - 고려 의종 때의 환관. 인종 때 內侍西頭供奉官이 되고 의종의 유모를 처로 삼았는데, 의종이 즉위한 뒤 內殿崇班이 되었다. 1151년(의종 5)에 왕비를 德興宮主에 봉하고 벌인 잔치에서 왕이 내린 서대를 불법적으로 띠고 나오자 대관과 마찰했으며, 權知閤門祗候에 임명되자 대관 이 환관으로 朝官에 참여한 적이 없다고 하여 철회시켰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散員 鄭壽開를 시켜 臺省이 왕의 동생 대령후 暻을 추대한다고 무고하고 외척과 朝臣이 대령후와 연결되었다고 참소하 였으나, 무고임이 밝혀져 대간을 모함했다는 죄로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다시 내시에 복직되었는 데, 1156년 낭장 최숙청이 정함을 제거하려다가 유배되었고,다음해에 권지합문지후에 다시 임명 되 어 재상과 간관에게 임명장에 서명하기를 강요했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의종의 측근으로 계속 성장하여 왕광취· 백자단 등과 함께 권세를 휘두르다가, 1158년 신숙의 파면 요구로 잠시 파 면 되었다가 다음해에 복직되었다. 김존중은 정함과의 친분을 바탕으로 내시에 소속 되었다가 다시 형부낭중거거주 보문각 동제학에 오른다. 이때 김존중은 정함과 협의하여 대간들을 이끌며 의종의 행동을 규제하던 정습명을 탄핵 하여 죽게 만든다. 그러자 정함은 그를 왕에게 극력 추천하여 우승선에 오르게 한다. 우승선에 오른 김존중은 내시 낭중으로 있던 정서를 역모죄로 몬다. 정서는 의종에게는 이모부가 된다. 정서는 대 령후 왕경과 왕래가 잦았고, 의종은 그들의 친분이 못마땅해하자, 그러한 의종의 내면을 읽고 있던 정함과 김존중은 정서와 대령후가 역모를 도모하고 있다고 고변 하고 탄핵해서 동래로 귀양 보낸다. 이 귀양지에서 정서는 「정과정곡」등의 고려가요를 남기게 된다. 1156년 김존중이 등창으로 앓아눕자 아부하는 자들이 문병을 하기위해 줄을 섰고 그가 죽자 의종 은 심히 슬퍼하였다. ● 정중부의 난과 문신귀족의 몰락 정중부의 난은 고려 관료사회의 무반에 대한 홀대에 반발하여 일어난 반란사건으로 명종 대 이후 백 년간 지속되는 무신정변의 시초가 된다. 광종대 이후 과거제가 정착되면서 고려사회는 통일전쟁기의 과도기적 관료체제에서 벗어나 문신 중 심의 지배 체제를 확립한다. 이같은 관료체제는 무신의 최고품계로 정3품 상장군에 한정 시켰고 이 때문에 전쟁 상황 속에서도 무신은 언제나 문신출신 상원수의 명령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강동6주를 얻어낸 서희, 귀주대첩의 강감찬, 여진정벌을 단행해 동북9성을 군설한 윤관 등이 모두 문신출신이다. 고려의 병권구조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 것은 인종 때에 권력을 독식하던 이자겸의 기형적인 정국 운영이 이뤄지면서부터였다. 문신출신인 그가 사병을 육성하여 국가의 군사체제를 동요케 한 것이다. 게다가 그는 무신 출신인 인종은 척준경에게 이자겸의 난을 종식시킨 공로로 정2품의 평장사 벼슬을 내리면서 무신에게 정3 품 이상의 벼슬을 내리지 않던 관습이 깨어졌다. 이로써 무신들은 광종 이후 오르지 못할 나무로만 여겼던 재상직에 오를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묘청의 난으로 무신들이 가담하고 난이 진압되자, 자연히 무신 등의 입지가 약화되고 문신들의 입지가 강화 되었으며 이때부터 개경 의 문신들은 무신들을 멸시하는 경향을 띠게 되었고, 의종때 와서 왕이 일부 간사한 문신들과 향락 을 즐겼고 그러한 경향은 더욱 짙어갔다. 정중부의 난은 바로 이시기에 일어난 다소 우발적인 사건 이었다. 무신정변을 주도한인물은 이의방, 이고, 채원등 하급장교들 이었고 정중부는 그들의 계획에 동조 했을 뿐이다. 하급무장들이 오래 전부터 반란을 꾀하고 있는데 반해 정중부등 고위직 무장들 은 반란을 실행할 의지가 없었다고 할 수있다. 그러나 정중부의 동의 없이는 난은 성공 할 수가 없 었고 그런 의미에서 보면 정중부의 공이 결코 적다고 할 수는 없다. 무신의 난 직후 권력을 장악한 세력은 당연히 이의방 등 소장세력이 될 수 밖에 없었다.
■ 제19대 명종 1131년-1202년. 재위기간 1170년-1197년. 27년간. 40세 즉위.
● 허수아비 임금 명종과 무신들의 정권다툼. 정중부의 반란으로 명종이 즉위하면서 고려는 무신정권의 시대로 접어든다. 왕은 존재하나 힘이 없고 모든 권력은 일부 무신들이 장악하여 치열한 정권다툼을 벌이는 가운데 곳곳에서 반란사건이 잇따른다. 이로 인해 국가기강은 무너지고 민심은 흉흉해져 경제는 파탄지경 에 이른다. 왕위에 오른 명종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모든 권력은 난을 일으킨 무신들이 쥐고 있었 고 명종은 그들 무신들의 권력싸움의 틈바구니에 끼어 목숨을 부지하기에 바빴다. 그만큼 그는 소 심하고 우유 부단한 성격이었다. 명종은 즉위하자 곧 정중부, 이의방, 이고등을 벽상공신으로 삼아 그들의 화상을 그려 전각에 붙이 고 양숙 채원등은 그다음 자리에 두게 하였다. 이렇게 되자 정권을 장악한 무신들은 중방을 설치하 고 권력을 농단하면서 조정을 독점하기위해 각기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 무신정권을 풍미한 인물들 온건파 - 정중부, 양숙, 진준, 기탁성, 이소응, 홍준방등 무반 고위인사들. 강경파 - 이의방, 이고, 채원등 하급 무장들. 1170년 정중부,이의방,이고,채원등이 모의하여 보현원 오문앞에서 임종식,이복기등을 죽이고 정변을 일으킴. 한뢰,김돈중을 비롯한 문관들과 왕광취등 환관들을 참살하고 의종을 폐위하고 명종을 추대. 1171년 이고가 무리배들과 결탁하여 반란을 도모하나 김대용의 밀고로 이의방에게 누설돼 살해 되 고 이후 채원도 반란의 소지가 있다 하여 살해된다. 1172년 귀법사 승려 백여명이 이의방을 타도하고자 도성 북문으로 침입했으나 이의방이 즉시 출동 하여 공략하니 승려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이의방은 중광사,홍법사,용흥사등을 약탈해서 승려들의 기 를 꺽었다. 1173년 김보당의 난 - 도북면 간의대부 김보당이 정중부와 이의방을 벌하고 의종을 복위시켜야 한 다고 주장하여 군사를 일으키나 정부군에 대패하고 김보당이 생포되어 저잣거리에서 살해되고 문신 들도 대거 학살됨. 1174년 조위총의 난 - 의종을 시해한 이의방정권을 타도한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키고 이 사건 으로 유배 가있던 의종은 경주에서 이의민에 의해 허리가 꺾인 채 살해된다. 1174년 정중부의 아들 정균이 승려 종강과 모의하여 이의방을 살해함으로써 정권은 정중부에게로 넘어간다. 1176년 망이 망소이의난 - 공주 명학소에서 일어난 천민집단의 난. 1179년 1179년 경대승, 허승등이 모의하여 정중부 부자를 살해하고 그의 측근들을 제거함. 중방을 무력화하고 도방을 설치해서 측근을 배치하고 경대승의 정권이 4년간 간다. 이때 그의 나이는 26세. 1183년 정중부의 귀신을 보고 놀란 경대승이 갑자기 죽자 정권은 이의민에게로 넘어감. 정권을 장악한 이의민의 집권은 13년 간이나 지속된다. 1196년 이의민의 아들 이지영이 최충수의 집비둘기 강탈사건으로 앙심을 품고 최충헌과 모의하여 이지영을 비롯한 이의민 일가와 그 측근들을 살해하고 이후로 최씨의 무신정권은 60년간 지속된다. 최충헌 - 최이 - 최항 -최의에게로 4대에 걸쳐 집권함. ● 무신 집권기의 지배 기구 중방 : 무신 정권 초기의 권력기구 교정도감 : 최씨 정권 내의 최고 권력기구 정방 : 최우가 만든 인사 독점 기구 도방 : 경대승이 만든 사병 기구 삼별초 : 최우가 만든 사병 기구 . 야별초-> 좌별초, 우별초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으로 확대
■ 제20대 신종 1144년-1204년 재위기간 1197년 - 1204년. 6년 집권. 54세 즉위.
● 늙은 왕 신종의 즉위와 최씨 무신정권의 성립 신종시대에는 최씨 무신정권이 장기집권의 기반을 닦는가 하면 전국각지에서 민란이 끊이지 않아 고려사회는 건국이래 최악의 상태를 맞이한다. 최충헌 형제와 그의 측근들은 명종을 제거한 후 차기왕으로 사공 왕진과 평양공 왕민중 한 사람으 로 왕으로 세우고자 하였다. 논의 끝에 금나라 에서 사공 왕진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왕위를 찬탈했다는 의심을 살 염려가 있으므로 의종의 전례에 따라 왕민을 왕으로 세우는 것이 바람직하다 는 박진재의 판단에 따라 결국 왕민이 차기 왕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금나라 에서는 왕위찬탈 의 혹이 있다면서 몇 차례에 걸쳐 사신을 보내 명종을 대면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최충헌 등이 명종은 요양차 아주 먼 곳에 있기 때문에 30일 이상 걸어야 만날 수 있다고 거짓말하여 신종은 가까스로 금나라 왕의 책봉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신종은 이름뿐인 왕이었고 조정 대소사의 모든 결정 권은 최충헌을 비롯한 그의 측근들이 다 쥐고 있었다. 그들은 권력에 눈이 멀어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하기에 여념이 없었고 자기들끼리 알력이 생겨 마침 내 치열한 싸움으로 이어졌다. 최충수는 최충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삼으려 하다가 최충헌에게 죽음을 당 하고 박진재도 후에 지나치게 권력을 확장시키다가 최충헌 에게 양쪽다리의 심줄이 잘리는 형을 당 하고 유배되어 죽었다. 최충헌은 이처럼 권력을 위해서는 혈육도 가차없이 죽이는 모습을 보이며 독재정치를 구현해 나갔다. 최충헌은 1197년 상장군으로 오른 그해 추밀원지주사등 거듭 승진되었 고, 1203년에도 거듭 승진을 하게 되자 조정의 병권 및 인사권 등 행정권을 완전히 장악한다. 이로써 최충헌은 장기집권의 토대를 구축하였고 고려 왕실은 점점 힘을 상실하여 왕의 존재는 아무 런 의미가 없게 되었다. 이와 같은 공포정치를 실시하며 조정을 독식하던 그는 1203년 중서문하 평장사에 올랐다가 1205 년 만인지상 일인지하인 문하시중이 되었다. 이때 그는 이규보를 등용하여 정중부의 난 이후 거의 자취를 감췄던 문인들을 등용하였으며 1209년 도정교감을 설치하여 국정전반을 그 곳에서 처결 하였다. 1211년(희종7년) 예시낭중 왕준명등이 궁궐 내에서 그를 살해하려는 음모에 휘말려 가까스로 목숨 을 구한 사건이 발생하자 그 일을 방관한 희종을 내쫓고 그의 아들 강종을세웠다. 이후 1218년에 70세가 되어 스스로 치사할 것을 청원하였으나, 강종은 그에게 칠순이 넘도록 관직 에 머물도록 허락하는 궤장을내렸다. 하지만 이듬해 병이 들자 그는 궤장을 반납하고 병세가 악화 되어 7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 만적의 난 1198년 신종원년에 최충헌의 사노 만적은"정중부의 난이래 고관대작이 천민노예에서 만이 나오고 있다. 귀천이 따로 있겠는가 ? 때가 오면 누구나 정권을 쥘 수있는 것이다"라고 말하 며 동지 6명과 함께 가기 그들의 상전을 죽이고 노예의 문적을 불살라 그들 스스로 해방을 쟁취하 고자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죽음을 당했다.
■ 제21대 희종 1181년-1237년. 재위기간 1204년-1211년 7년.
● 왕권 회복을 꿈꾸는 희종과 최충헌 제거계획 희종 역시 신종과 마찬가지로 실질적인 왕권은 없었으며 국사 전반에 관한 모든 결정은 최충헌에 의해 이루어 졌다. 하지만 희종은 신종과 달리 부왕의 선위를 받아 왕실의 예법에 따라 정식으로 왕위에 올랐다는 측면에서 즉위에 대한 대의 명분이 분명했다. 이같은 사실은 왕권을 회복할 수 있 는 좋은 기반이 될 수있었기 때문에 최충헌을 제거 하려는 움직임이 가속화 되기 시작했다. 희종 즉위 년에 최충헌부자를 살해하기위해 급사동정 지귀수의 집에 모여 모의하다가 발각 되었고,1209 년에도 청교역리 3명이 최부자 살해 계획을 세웠다가 귀법사 승려의 고발로 실패 하기도 하였다. 이 당시 범인들을 색출하기위해 임시로 설치된 교정도감은 그 후부터 무소 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기관으로 자리 잡는다. 최충헌은 스스로 교정도감의 별감으로 있으면서 그 곳에서 모든 국사를 처 리 했으며 그가 죽은 후에는 최의, 최항, 최의가 교정별감직을 세습하여 왕권을 대신하게 된다. 1211년 그 동안 최충헌의 왕권능멸을 지켜만 보고있던 희종은 측근 내시들과 모의해 최충헌 세력 을 제거하고자 거사를 결행한다. 최충헌이 왕을 배알하기위해 수창궁으로 찾아 들었고 희종은 그 를 데리고 내전으로 들어갔다. 중관 내관들이 최충헌 수하들을 궁궐 깊숙한 곳으로 유인하자 미리 잠복 하고 있던 10여명의 승려와 무사들이 그들을 습격하였다. 때문에 내전복도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바깥이 소란스러워지자 최충헌은 자신을 죽이기위해 자객이 들이 닥친 것으로 판단하고 희종 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 하였으나 희종은 내실의 문을 닫고 최충헌 을 내실로 들이지 않았다. 이에 최충헌은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급한 김에 지주사 다락에 몸을 숨겼고, 그의 수하들이 내전으로 달려가 최충헌을 구했다. 최충헌을 구한 김약진은 궁궐로 군 사를 몰아 임금을 비롯한 모든 내인들을 죽이려 하자 최충헌은 이를 만류하며 자신을 제거하려 한 왕준명 등 중관들 을 체포하여 모두 죽이거나 유배시키고 이들의 모의를 후원한 희종을 폐위시켜 강화도에 유배시켰다. 희종은 유배지를 떠돌다가 노년에 법천정사로 옮겨 1237년 57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 제22대 강종 1152년-1213년. 재위기간 1211년-1213년 1년. 60세에 즉위함.
● 강종의 황혼녘 짧은 치세 강종은 명종과 의정왕후김씨의 맏아들로 1173년 태자로 책봉되었으나 1197년 최충헌에 의해 명종 이 쫓겨날 때 강화도에 유배되었다. 1210년에 개경으로 돌아왔으며 1211년 한남공에 봉해졌다가 12월에 최충헌이 희종을 폐위시키고 그를 옹립함에 따라 60세에 즉위하였다. 그는 부왕 명종이 강제로 퇴위됨에 따라 14년 동안 강화도에서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따라서 그에 게 왕위가 넘어 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였는데 희종이 왕권회복을 위해 최충헌을 제거 하려다 가 실패하는 바람에 환갑을 앞둔 나이에 곤룡포를 입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오랜 유배생활 로 몸은 병이 들었고 1213년 지병으로 병상에 누워 태자 진(고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62세를 일 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강종에 대해 사관은 "강종이 임금으로 있을 때 일체정사는 강신들의 통제를 받았으며 갑자기 병에 걸려 국왕으로서 행복을 누린지 며칠되지 않으니 슬픈 일이로다". 라고 평가하고 있다. 사평왕후 이씨는 이의방의 딸이다. 강종이 태자로 있을 때 이의방의 권세에 의지하여 1174년 3월에 태자비에 책봉되었다. 하지만 그 해 12월 정균에 의해 이의방이 살해되면서 입궁 9개월만에 대궐에서 쫓겨났다. 그 후 강종이 왕위 에 오르자 왕후에 추존되었다.
■ 제23대 고종 1192년-1259년. 재위기간 1213년-1259년. 45년.
● 고종시대의 계속되는 변란과 대몽 항쟁 최씨 무신정권이 안정기로 접어든 고종시대는 몽고의 중흥기로 고려를 비롯한 아시아국가 전체가 전쟁에 휘말린다. 서쪽으로 밀려났던 거란이 다시 동으로 쫓겨 왔으며 남으로 밀려났던 송이 망국 에 직면하고 북쪽의 맹주로 자리한 금도 몰락한다. 몽고의 이같은 무서운 팽창정책에 맞서 고려는 수십 년 동안 영토수호 전쟁을 수행하고 무신정권 내부에서는 권력투쟁이 이어지고, 왕실은 무신들 의 암투를 이용하여 왕권을 회복하려 한다. 1218년 거란의 침입이 있자 고려조정은 몽고, 동진, 금 등과 연합하여 거란군을 격퇴키로 결정하고 1218년 12월 합진과 찰라가 이끄는 몽고군 1만과 동진의 군사2만이 연합군을 형성하여 화주,맹주, 순주, 덕주 등을 무너뜨리고 거란의 본거지인 강동성으로 향하자 김취려와 조충이 이끄는 고려군도 이들과 합세하여 강동성을 애워쌓다. 이에 거란군은 한 달간을 버티다가 1219년 정월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하였다. 이에 몽고는 고려에 강화를 청하였고 형제지국의 관계를 형성한다. 그 후 몽고군이 돌아가면서 수하 40여명을「다루가치」 의주에 남겨 두었고 이 때문에 고려 전역엔 '가을에 몽고군이 다시 온다' 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이 와중에 1219년 실권자 최충헌의 병이 악화되었고 후계자를 놓고 최이와 최항이 다툼을 벌였다. 최충헌의 측근인 대장군 최준문, 상장군 지윤심, 장군 유송절,낭장 김덕명등 4인이 최이를 없애고 최향을 후계자로 세우려 하다가 되레 최이 에게 당하였다. 이 사건으로 최향, 최향의 장인, 처남, 노비 등이 유배 되었으며 그 해9월 최충헌이 죽자 국정 전반에 관한 모든 실권은 최이에게로 넘어갔다. 한편 고려와 형제관계를 맺은 몽고는 수시로 사신을 보내 고압작인 자세로 공물을 요구하였고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최이는 몽고와의 전쟁에 대비하여 1221년 의주,화주,철령등지에 성을 쌓게 하였다. 그런데 1225년 정월에 몽고의 사신 저고여가 고려에 왔다가 귀국하는 길에 도적들에게 피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몽고는 고려의 소행으로 보고 보복을 선언했다. 이 때문에 양국간에 국교가 단절 되고 긴장이 강화됐다. 이때 경상도 지방에 왜구들이 침입하여 민가를 괴롭히자 조정은 일본정부와 우호관계를 맺고 왜구를 소탕했다. 1227년 징기스칸이 죽자 몽고족의 풍습에 따라 셋째 아들 오코타이가 칸에 선출 되지만 일찍 죽고 징기스칸의 손자 쿠빌라이가 칸이 되어 수도를 북경으로 옮기고 원을 세우고 몽고 제일주의 즉 민 족차별 정책을 썼다. 몽고는 1231년 살리타의 지휘아래 압록강을 건너 왔으며 이는 7차례에 걸쳐 28년 동안 지속적으로 자행된 고려침략의 서막이었다. 1231년 몽고가 대군을 이끌고 제1차 침입을 감행했다가 화의약조를 하고 물러가자 최이는 도읍을 강화도로 옮기고 백성들을 섬과 산성으로 이주시켜 몽고군과 전면전을 감행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고종은 강화도로 이어 하는 것을 반대하고, 최이는 강화도로 옮겨야 된다고 강요하는데도 불구하고 궁궐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이에 최이는 녹전차 백여대를 동원하여 자기집 재산을 모두 강화도로 운반토록 하고 기일을 정하여 궁궐의 모든 기관을 강제로 강화도로 가도록 하였다. 그는 강화도로 떠나지 않는 관리들은 모두 군법에 따라 처벌하겠다고 엄포를 놓았고 동시에 군사를 대대적으로 동원하여 강화도에 궁궐을 축성하였다. 최이의 강압에 못이긴 고종도 어가를 타고 강화도의 새 궁 궐로 들어갔다. 고려의 도읍이 강화도로 옮겨 갔다는 소식을 듣고 몽고는 다시금 대병력을 보내 고려를 침범하였다. 이후부터 약30년간 몽고의 침략은 계속되었다. 1232년 서북면과 서경에서 몽고 잔병인 다루가치를 습격하자 이에 자극을 받은 몽고는 2차 침입을 시도하고, 고려군은 결사항전을 다짐하며 군관민이 단결하여 싸웠다. 그해 12월 수원의 처인성에서 김윤후가 몽고원수 살리타를 살해했고 이에 몽고군은 당황하여 서둘러 철군하였다. 1247년 몽고군은 고종의 개경환도를 요구하며 다시 침입을 했는데 이때 몽고 왕이 죽었다는 연락 이 오자 그들은 곧 철수하였다. 1249년 11월 최이가 죽고 그의 아들 최항이 후계를 이었는데 최항 도 최이와 마찬가지로 몽고에 대하여 강경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권구도에 큰 변화는 오지 않았다. 몽고군은 1251년 다시 출륙환도를 요구하였다. 이에 고종도 환도의 뜻을 품었지만 최항의 반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1253년 몽고군은 제5차 침입을 강행했고 고종이 몽고의 요구를 일부 받아들여 승천부로 나와 몽고 사신을 맞이함으로써 다시 한번 몽고군은 철군하였다. 그 뒤 몽고군은 끈질기게 고종의 출륙환도를 주장했고, 고종은 화의조약을 얻어내기 위해 김수강을 몽고 왕에게 보냈고 김수강의 뛰어난 언변에 감탄한 몽고왕은 고려국왕의 친조와 출륙환도를 다짐받고 철군을 단행했다. 최항은 몽고왕의 친조는 물론이고 출륙환도도 미뤘으며 해마다 보내던 공물도 중단시켜 버렸다. 이무렵 최항은 중병이들어 병상에 누웠고 1257년 윤사월에 서자 최의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죽었다. 1257년에는 몽고군이 제7차침입을 강행해왔고 국왕의 친조를 요구하던 몽고는 수위를 낮춰 태자의 입조로 대신할 것을 제의했고, 이에 따라 양국간의 강화가 성립되는듯했다. 하지만 고려에서 태자가 병이 났다는 핑계를 대며 안경공창을 대신 보내자 몽고의 공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1258년 4월 유경, 김인준등에 의해 최의가 피살됨으로써 그 동안 몽고에 대하여 강경자세를 취하던 최씨 무신 정귄이 무너졌다. 그 해12월 고려조정은 박희실과 조문주를 몽고에 보내 최이의 죽음을 알리고 출 륙환도와 태자의 입조를 약속했다. 그리고 이듬해 왕태자가 40여명의 대신들과 함께 몽고에 입조 함으로써 두 나라 사이에 화의가 성립되어 28년 동안 지속되던 여몽전쟁은 완전히 종결됐다.
고종은 재위기간 내내 숱한 전쟁을 겪다가 몽고와 화의조약을 맺던 1259년 6월 강화도에서 6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삼국지연의, 수호지, 동방견문록 등이 이 원나라를 보고 작성했다. 1271년 몽고는 원나라로 이름을 바꾸고 원 제국 성립. 남송 명망시킴. 또 고려의 왕족들은 원에 볼모로 잡혀 그 곳에서 원의 왕실과 결혼을 해야 했고, 결국 원은 고려를 자신들의 부마 국으로 삼으려 했다.
● 전란중에 핀 연꽃 팔만대장경 「팔만대장경」은 고종 때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만든 목각판으로 현재해인사 장경각에 보관하고 있 기 때문에 정식 명칭은 「해인사고려대장도감판」이다.「고려대장경」이라고 부르고 매수가 8만여 판에 달하고 8만4천 번뇌를 풀어내는 8만4천 법문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흔히「팔만대장경」이 라고도 부른다. 부처의 힘으로 외적을 물리치고 대장경판각사업을 통해 전 백성의 뜻을 하나로 모 으려는 일종의 정신교화라 할 수있다. 팔만대장경은 단순히 8만4천의 법문을 담고 있는 경전이 아 니라 고려인들의 민족적 자긍심과 국가에 대한 믿음을 엿볼 수 있는 정신적 산물이며 여몽 30년 전쟁이라는 뻘구덩이 속에서 피어오른 눈부신 연꽃이었다.
고종실록을 편찬한 사관들은 고종의 치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있다. "고종시대에 안으로는 권세를 잡은 가신들이 잇따라 나라의 명령을 제 마음대로 하였고 밖으로는 여진과 몽고가 해마다 군사를 보내어 침범하였으니 당시 나라형세는 상당히 위태로웠다. 그러나 왕 이 조심스럽게 법을 지키고 수치를 견디고 참았기 때문에 왕위를 보존하였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 정권이 왕실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적이 들어오면 성을 튼튼히 하여 굳게 지키고 적이 물러가 면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맺었으며 심지어는 태자를 시켜 예물을 가지고 직접 몽고에 들어가게 하 였던것이다. 이렇게 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사직을 유지하고 나라를 길이 보전할 수 있었다.
■ 제24대 원종 1219년-1274년. 재위기간 1259년 1274년 15년. 41세-56세.
● 원종의 친원정책과 무신정권의 종식 원종시대는 무신정권의 말기이자 원의 고려복속정책이 본격화 되던 시기로서 고려조정은 왕실중심 의 친몽파와 무신들이 이끄는 반몽파로 갈라진다. 원종은 1241년 태자에 책봉되고 1259년 4월 몽 고와의 화의정책에 따라 고종을 대신해서 몽고에 입조했다. 그 해 6월 고종이 죽자 실권자 김준은 고종의 둘째 안경공창을 왕으로 세우려 하였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자 1259년 6월 원종은 41 세의 나이로 왕에 올랐으며, 그가 몽고에 가있는 동안 김준 등 무신들의 호위를 받으며 태손 심이 왕위를 지키고 이듬해 3월 원종은 몽고에서 돌아와 비로소 왕위를 받았다. 1260년 몽고는 세조 쿠빌라리가 황제로 등극하여 국호를 원으로 고쳤다. 원종이 몽고를 방문 했을 때 몽고는 쿠빌라이와 아리패가가 왕위를 놓고 서로 대치하고 있었는데, 원종은 태자의 신분으로 헌종의 아우 쿠빌라이를 찾아갔는데 쿠빌라이는 신하들의 조언에 따라 그 를 일국의 왕으로 대접하였다. 이는 대륙의 모든 나라가 몽고의 무력에 굴복하여 항복을 하였는데, 오직 고려만이 30년을 항전하며 항복하지 않는 것에 대한 특별한 대우였다. 후에 쿠빌라이는 자신의 딸과 충렬왕(태자심)을 결혼시켜 사돈관계를 맺게 한다. 고종이 사망하였다 는 소식이 전해지자 수하 속리대로 하여금 원종을 호위하게 하였고 이같은 쿠빌라이의 호의적인 태 도를 접한 원종은 그 후부터 다소 친몽적 경향을 띠게 된다. 최씨 무신정권이 무너진이후 왕은 형식적으로는 왕권을 되찾았지만 실질적으로는 전혀 힘이 없었다. 원종은 몽고측의 출륙환도와 무신들의 강화도 고수 주장 사이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한다. 내심 몽고의 힘을 이용하여 무신들에게 뺏긴 정권을 환수하고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려는 의지도 키우고 있었기 때문에 원의 간섭으로부터 벗어 나려고 하였다.하지만 이같은 의지는 무신들 의 강한 반발로 한동안 실행되지 못한다. 새로운 무신정권을 이끌고 있던 사람은 김준이었다. 최의 를 제거하던 당시에는 유경이 권좌에 있었으나 권력 투쟁이 전개되는 과장에서 난을 실질적으로 주 도 했던 김준이 유경을 밀어 내고 권좌에 오르게 된다. 이 때문에 강화 궁궐에 도착한 원종은 정사 는 뒷전으로 미루고 방탕한 생활을 일삼는다. 한편으로는 무신정권을 몰아내고 왕권을 회복하려는 전략적 차원에서 몽고와의 유대관계 강화에 주 력 한다. 원은 1268년 고려에 송나라 정벌을 위한 원군을 요청하였고 김준 부자 및 아우 김충으로 하여금 원병을 이끌고 연포로 올 것을 요구 했는데 김준은 몽고에 가면 권좌에서 밀려날 것이라는 생각에 원나라 사신을 죽이고 성으로 들어가 항전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원종은 김준의 이같은 의견에 반대 했다. 그러나 그 후 김준 부자와 김충은 몽고를 다녀왔고 이후 김준과 원종 관계는 매우 악화 된다. 김준은 몽고의 사신을 영접하는 일이 없었고 몽고의 요구에 대해서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몽고 사신에게 죽이겠다는 협박을 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원종은 김준을 극도로 미워 하였고 급기야 1268년 12월 원종은 임연을시켜 김준과 김충을 살해케 했고 김창세, 허인세 등의 도당들도 함께 제거되자, 원종은 개경환도를 서두르며 친몽정책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무신정권을 이끌고 있던 임연은 원종의 이같은 행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임연은 재상들 을 모아 원종을 폐립하기로 결정하고 왕의 친서 형식을 빌어 원종의 병이 위독하여 안경공 창에게 선위 한다는 서신을 원나라에 보냈다. 그리고 1274년 6월 원종을 폐위하고 창을 왕으로 세웠다. 이때 태자 심(충렬왕)은 몇 개월 전에 몽고로 떠나 그 곳에 머무르고 있었다. 원 세조 쿠빌라이는 국왕폐립 사건에 대해 추궁하고 몽고측은 원종과 안경공창, 임연 등을 연경으로 호출한다. 사태가 이렇게 번지자 임연은 그 해 11월 대신들과 의논한 뒤 안경공을 폐위하고 원종은 5개월만에 왕위 를 회복시켰다. 며칠 뒤 원종은 왕창과 함께 쿠빌라이의 호출에 호응하여 몽고로 떠났다. 1270년 원종은 몽고에서 돌아오면서 바로 개경환도를 시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임류무는 방호사 및 각 산 성별감들을 각지에 파견하여 백성들을 육지로 나오지 못하게 함으로써 개경환도를 강력하게 저지하 였다. 이에 원종은 임유무를 제거한다. 이로써 일 백년 동안 지속되던 무신정권은 종식되었고 40년 가까이 머무르던 강화도 궁궐시대도 끝이 났다. 1273년 마지막 반몽세력인 삼별초가 몰락하자 고려 조정은거의 원에 복속 되었으며, 1274년에는 원나라의 매빙사가 와서 남편이 없는 부녀자 140명을 요구하자 결혼도감을 설치하여 민간에 혼자 사는 여자와 역적의 처,노비의 딸 등을 뽑아 원에 공녀 로 보내는 처지가 된다. 또한 이해에 태자 심이 원의 부마가 됨으로써 고려에 대한 원의 입김은 더 욱 강화된다. ● 무신정권 1기 형성기 -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2기 심화기 - 최충헌, 최이, 최항, 최의. 3기 해체기 - 유경, 김인준, 임연등 김인준(김준)은 최충헌의 노비 김윤성의 아들임. 1264년 교정별감에 임명되어 군권 및 감찰권을 손아귀에 넣게 되고 1265년엔 문하시중이 됨.
● 원의 고려복속 정책과 삼별초의 난
1270년 6월 삼별초는 장군 배중손과 야별초들이 이끌고 있던 노영희의 지휘아래 반란을 일으키고 승화후 왕온을 왕으로 옹립하였다. 이같은 삼별초의 반란은 반몽 감정이 깊어진 고려 하층민들의 호응을 받았다. 일반 민간은 고려 왕실이 친몽적 경향을 띠며 출륙환도를 단행한 것에 대해 비판적 자세를 보였고 삼별초는 이같은 민간의 동향을 기반으로 반몽세력을 규합하려 했던 것이다. 삼별초 는 강화에다 관부를 설치하고 강화도에 남아있던 귀족들을 모두 배에 태워 진도로 이송시켰다.이에 조정은 무척 당황하였다. 몽고군은 원래 해전에 약했고 고려 정부군은 삼별초에 대항할 힘이 없었 기 때문이다. 삼별초는 진도 거제도등 도서해안과 남해,마산,동래,김해 등지에서도 강력한 군사활동 을 벌였다. 1270년 여몽 연합군과 삼별초간의 대대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역전에 역전이 거듭되고 1271년 몽고 지휘관 홍다구가 고려 정부군과 함께 진도에 대한 총공세를 감행한다. 이때 배중손이 전사하고 승화후 왕온이 홍다구에 의해 살해 됨으로써 삼별초는 대단한 타격을 입는다. 또한 11월 에는 제주도를 공략하여 새로운 거점 확보에도 성공하였다. 1273년 2월 여몽 연합군은 제주도에 대한 공격 계획을 수립하여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한다. 이때 연합군 함선 160척, 수륙군은 1만명 이었다. 이같은 대공세에 밀린 삼별초는 계속 후퇴하다가 뿔뿔 이 흩어졌고 삼별초를 이끌고 있던 김통정은 그해 4월에 전사하였고 잔여 삼별초 1천3백 여명이 포로로 붙잡혔다. 이로써 삼별초 난은 반기 3년만에 완전히 종결되었다. 삼별초의 난은 단순히 무신정권을 수호하려는 군사 반란의 차원을 넘어선 고려 백성들의 대몽 자주 전쟁의 성격이 짙다. 하지만 삼별초의 난이 몽고군의 입지를 강화시켜 몽고의 고려복속정책을 가속 시킨 면도 없지 않았다.
■ 제25대 충렬왕 1236년-1308년. 재위기간 1274년-1298년1월. 1298년 8월 복위-1308년7월 39세 -73세.
● 변발한 충렬왕과 원의 부마 국으로 전락한 고려
원 세조의 부마가 된 충렬왕이 즉위하면서 고려는 급속도로 원의 속국으로 전락한다. 친원 정책덕분으로 고려 왕실은 오히려 무신정권에게 잃었던 힘을 회복하게 되고 이에 따라 조신들 의 힘은 미미해져 정치가 실종되고, 사회 전반에 변발과 호복 차림의 몽고 풍속이 만연하여 고려는 점차 자생력을 잃어 간다. 충렬왕은 1259년 6월 고종이 죽자 몽고에 입조해있던 원종을 대신해 임시로 국사를 대리 하였으며 1267년에 태자에 책봉되었다. 1272년 원나라에 입조하여 연경에 머물렀으며 1274년 원 세조의 딸 제국대장 공주에게 장가들어 원의 부마가 되었다. 친원 정책을 표방한 충렬왕은 즉위 4개월만에 원 의 요구로 일본 정벌을 단행한다. 일본 정벌을 위해 몽고군과 한족 연합군 2만5천을 동원하였고 뱃 길 안내자 및 수군 6천7백명이 가세하여 총 4만여 군사가 9백여척의 배에 나눠타고 일본 정벌길에 올라 대마도를 장악 하였다. 하지만 태풍으로 인해 일본 본토로 나가지 못하고 회군하였다. 원은 다시금 일본 정벌을 준비하기 위해 정동행성을 설치하고 1281년 에는 15만의 여원 연합군을 형성하여 일본으로 떠났다. 하지만 이번에도 태풍우로 인해 본토 진입에 실패하고 원 세조는 지속 적으로 고려 조정에 일본정벌을 강요하여 민간의 피해가 극에 달했다. 그런 가운데 1290년에는 원 을 괴롭히고 있던 내안의 합단군이 고려에 내침하여 충렬왕이 조신들을 이끌고 강화도로 천도 하는 지경에 이런다. 합단은 한때 원주와 충주를 함락하고 개경을 위협하는등 고려군을 궁지로 내몰았으 나 원나라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1년 반만에 종결됐다. 설상가상으로 북방야인과 왜구들의 침입마져 잦아졌고 고려사회는 더욱 불안 해지기 시작한다. 원은 고려의 행정관제를 자신들보다 격하시킬 것을 주장하고 묘호에 조나 종 대신에 왕을 붙이도록 했고 왕의 시호 앞에는 일괄적으로 충자를 붙이도록 강요하였다. 또한 宣旨는 王旨로 짐朕은 고孤 로 폐하陛下는 전하殿下로 태자는 세자로 격하되었다. 충렬왕은 점차 몽고에서 배운 사냥에 빠져 정사를 뒷전으로 미루고 국고를 탕진하였으며 그의 총애 를 믿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던 궁인 무비의 횡포가 나날이 심해졌다. 이 때문에 제국대장 공주와 세자 원의 반발이 심했지만 충렬왕의 잦은 사냥과 폐행은 계속되어 일부 신하들의 권력독식이 심화 되었다. 이렇게 되자 충렬왕과 세자간에 알력이 생겼고 세자는 1296년 원에 가서 진왕 감마라의 딸 계국대장공주에게 장가들어 원의 부마가 된다. 이듬해 5월 세자원의 모후 제국대장공주가 사망하여 충렬왕과 세자간의 알력은 더욱 심해진다. 세자원은 그해 7월에 귀국하여 궁인 무비와 환관 도성기 등을 죽이고 그들의 도당 40 여명을 귀양 보낸후 다시 원나라로 떠난다.이로써 원 왕실은 세자 원을 지지하게 되고 충렬왕은 스스로 왕위를 내놓고 물러 나겠다는 글을 원에 보낸다. 충렬왕이 물러남에 따라 1298년 1월에 세자원이 즉위하 여 왕위에 오르니 그가 충선왕이다. 하지만 충선왕은 고려 제도를 복원 하는등 자주적 기틀을 마련 하려고 하다가 왕비인 계국대장공주가 원에 무고하는 바람에 즉위 7개월 만인 그 해 8월에 국새를 빼앗기고 왕위는 다시 충렬왕으로 넘어가고 충선왕은 원으로 압송당한다. 이후 충렬왕은 아들 충선왕을 제거하기위해 왕위를 10촌 종제인 서흥후 전에게 계승시키고 계국 대장공주를 그에게 개가 시키려는 음모에 가담한다. 그는 이일을 성사 시키기 위해 1305년에 직접 원나라를 방문하여 2년간 머물기도 하였다. 그러나 1307년 정월에 원나라 성종이 죽고 충선왕이 무종의 옹립에 공을 세워 힘이 강해지는 바람에 이 계획은 무산된다. 무종의 신망을 얻은 충선왕은 그 후부터 실권을 장악하였으며 아직 태자로 있던 무종의 힘을 빌어 그 동안 자신과 부왕 사이를 이간질 시키던 왕유소, 송영방, 송린, 한신, 송균, 김충의, 최연 및 그 일당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 악하게 되자 충렬왕은 허수아비로 전락하고 모든 정사는 충선왕이 주관하게 된다. 아들 충선왕을 제거하기 위해 원나라 행을 강행했던 충렬왕은 비참한 몰골로 1307년 4월 귀국길에 올랐으며 이듬해인 1308년 7월 7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 일연과 삼국유사
삼국유사 [三國遺事]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의 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一然:1206∼89)이 신라· 고구려·백제 3국의 유사(遺事)를 모아서 지은 역사서. 1999년 11월 19일 부산유형문화재 31호로 지정되었다. 활자본이며, 5권 2책으로 구성되었다. 편찬 연대는 미상이나, 1281∼1283년(충렬왕 7∼9) 사이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현재까지 고려시대의 각본(刻本)은 발견되지 않았고, 완본으로는 1512년(조선 중종 7) 경주부사(慶州府使) 이계복(李繼 福)에 의하여 중간(重刊)된 정덕본(正德本)이 최고본(最古本)이며, 그 이전에 판각(板刻)된 듯한 영본 (零本)이 전한다. 본서는 김부식(金富軾)이 편찬한 《삼국사기(三國史記)》와 더불어 현존하는 한국 고대 사적(史籍)의 쌍벽으로서, 《삼국사기》가 여러 사관(史官)에 의하여 이루어진 정사(正史)이므 로 그 체재나 문장이 정제(整齊)된 데 비하여, 《삼국유사》는 일연 혼자의 손으로 씌어진 이른바 야사(野史)이므로 체재나 문사(文辭)가 《삼국사기》에 못 미침은 사실이나, 거기서 볼 수 없는 많 은 고대 사료(史料)들을 수록하고 있어 둘도 없이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문헌이다. 즉, 그 중에서도 특히 고조선(古朝鮮)에 관한 서술은 한국의 반만년 역사를 내세울 수 있게 하고, 단군신화(檀君神話)는 단군을 국조(國祖)로 받드는 근거를 제시하여 주는 기록인 것이다. 그 밖에도 많은 전설 ·신화가 수록된 설화문학서(說話文學書)라고도 일컬을 만하며, 특히 향찰(鄕札)로 표기된 《혜성가(彗星歌)》 등 14수의 신라 향가(鄕歌)가 실려 있어 《균여전(均如傳)》에 수록된 11수와 함 께 현재까지 전하는 향가의 전부를 이루고 있어 한국 고대 문학사(文學史)의 실증(實證)에 있어서도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다.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은 일찍이 본서를 평하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중에서 하나를 택하여야 될 경우를 가정한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후자를 택할 것”이라고까지 하였다.
■ 제26대 충선왕 1275년 -1325년. 재위기간 1298년 1월-8월. 1308년 7월-1313년. 총 5년3개월.
● 충선왕의 傳旨 정치와 고려 조정의 불안정.
원 세조 쿠빌라이의 외손자인 충선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고려의 몽고에 대한 의존도는 더욱 높아진 다. 심지어는 왕이 재위기간 대부분을 원나라에서 기거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 지기도 한다. 이로 인해 고려 조정의 불안은 한층 가증되고 한편에선 왕위를 둘러싼 암투가 진행된다. 충선왕은 즉위후 2개월을 제외한 재위기간 전부를 원나라 연경에서 보냈고 이로 인해 고려조정은 항상 불안한 날을 보내야 했다. 충선은 1277년 1월 3세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298년 정 월에 태상왕으로 물러난 충렬왕을 이어 24세의 젊은 나이로 왕위에 오르지만 왕비 계국공주와의 불 화로 그해 8월에 왕위에서 쫓겨나 원나라로 압송되었다가 1308년 7월 충렬왕의 뒤를 이어 복위하 였다. 충선왕은 즉위하자 관제개혁을 실시하고 고려관제를 복구하는등 다소 반원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일명 '조비무고사건' 으로 불리는 일이 발생한다. 세자비 였던 조인규의딸 조비와 충선왕의 금실이 너무 좋자 이를 시기한 왕비 계국공주에 의해 발 생한다. 계국공주는 조비가 충선왕의 총애를 독차지하자 이를 질투하여 편지를 써서 원의 황태후 에게 전하게 된다. 공주는 충선왕이 조비만 총애하여 자신은 거들떠 보지도 않으며 관직을 변경하 여 반원적 차원에서 처리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그 결과 조비를 비롯한 최충소와 장군 유온이 순 마소巡馬所 에 갇히고 조인규와 그의처 는 원나라로 압송되었다. 원나라로 압송된 조인규는 고문을 견디다 못해 허위 자백을 하였고 조비와 내관 이온이 다시 원으로 압송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충선왕은 궁지에 몰리고 충렬왕 지지세력이 충렬왕의 복위를 도모한다. 이 때문에 1298년 8월 충선왕은 즉위 7개월만에 왕위에서 쫓겨나 원으로 호송되고 충렬왕이 복위 되었다. 충선왕이 새롭게 설치했던 관청과 관직도 모두 혁파되고 충렬왕대의 것으로 복원되었다. 원으로 호송된 충선왕은 그후 10년 동안 연경에 머문다. 그리고 충선왕은 원 왕족간의 왕위다툼에 가담하여 나름대로의 세력을 형성하고 이었고 자신이 지지하던 무종이 차기 왕으로 유력시되자 사 태는 반전 되 충선왕을 폐하기 위해 원에 갔던 충렬왕은 되레 충선왕에 의해 왕유소 등의 측근들을 모두 잃고 왕권 마져 상실한다. 그리고 1308년 7월 충렬왕이 죽자 충선은 다시 왕좌에 앉는다.
10년만에 왕위를 되찾은 충선왕은 즉위하자 조신들의 기강을 확립하고 조세의공평, 인재등용의개방 공신자제의 중용, 농장업의장려, 동성결혼의 금지, 귀족의횡포 엄단 등 혁신정치를 표방하였다. 하지만 원나라 생활에 익숙해 있던 그는 고려의 왕궁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던지 즉위 두달만에 숙부 인 제안공 왕숙에게 정권을 대행케 하고 다시 원으로 건너갔다. 때문에 개혁안은 허사가 됐고 고려 조정은 연경에 머무는 충선왕의 傳旨 에 의해 국정전반을 운영해야 했기 때문에 조신들은 개경과 연경을 오가며 국정을 수행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이 때문에 전승 최유업이 극언으로 귀국할 것을 상소 했지만 충선왕은 원나라 왕실의 후한 대접을 잃게 될까봐 귀국하지 않았다. 당시 충선왕은 원 무종의 신임을 받아 심양왕에 봉해져 있었으며 심 지어는 무종이 심양의 관리들에게 충선왕을 거치지 않은 청원이나 보고는 받지 않겠다고 공언한 상태였다. 따라서 충선왕은 이같은 절대적인 힘과 배경을 포기할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세 자 왕감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충선왕은 세자와 그의 측근들을 죽이면서 원나라 체류를 고집하였고 이로 인해 엄청난 물자가 매일같이 연경으로 이송되어야 했다. 하지만 조정대신들의 압박이 날로 거세지자 1313년 3월 둘째 아들 강릉대군 왕도에게 왕위를 물려 주는 극단적 조치를 내리고 신하들의 환국압력을 피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이때 충선왕이 이복형 강양공 왕자의 둘째 아들 왕고를 세자로 세우는 바람에 후에 충숙왕 과 왕고간에 치열한 왕위 다툼을 유발시킨다. 이렇듯 원 왕실이 부여한 지위를 누리기 위해 원나라 체류를 고집하던 충선왕은 연경의 저택에 만권당을 세워 그 곳에서 당대 명류들과 학문을 교류하기 도 했고 고려에서 이제현을 불러내 그들과 교류하게하여 고려학문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316년에는 심양왕의 자리를 조카 왕고 에게 물려주고 티베트 승려를 불러 계율을 받기도 하였다. 충선왕은 이처럼 무종, 인종 대를 거치면서 원 왕실의 후한 대접을 받으며 호화로운 생활과 권력을 동시에 누렸다. 하지만 1320년 인종이 죽고 영종이 즉위하자 입지가 약화되기 시작했고 결국 원 왕 실로부터 심한 환국 압력을 받아야만 했다. 거기다 고려 출신인 환관의 모략에 말려들어 토변 으로 유배되고 1323년에 태정제가 즉위하여 겨우 풀려나 연경으로 돌아갈수 있었으나 1325년 5월 중국 연경에서 5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정비왕씨 - 1287년 그녀는 원 왕실의 요구에 따라 공녀로 바쳐질 운명에 처했다. 그런데 당시 원 나라로 가던 충선왕이 장차 자신이 그녀에게 장가들려고 한다고 말하여 그녀를 공녀에서 제외했다. 그리고 1289년 충선왕과 결혼하여 세자빈이 되었다. 하지만 이 결혼이 동성혼 이라는 이유 때문에 원 세조의 많은 비판을 받았고 원은 고려왕실과 몽고 공주와의 결혼을 관례로 정착시키기 위해 고 의적으로 동성혼을 금지시키고 1308년에 충선왕은 동성혼을 법으로 금지시키고 왕실과 통혼 할수있는 대상으로 15개 귀족 가문을 선정하게 되었다.
■ 제27대 충숙왕 1294년-1339년. 재위기간 1313년 -1330년 .1332년 2월복위 - 1339년 2월. 24년
● 충숙왕의 위태로운 삶과 불안전한 왕위
충선왕은 왕위를 충숙왕 에게 물려 주면서 동시에 조카 왕고를 세자로 세웠다. 이같은 충선왕의 이 해 못할 행동은 고려조정을 왕위 쟁탈전의 소용돌이로 휘몰아 간다. 이 때문에 충숙왕은 누차에 걸쳐 원나라에 소환 당하는 수모를 겪다가 급기야 왕위를 내놓아야 하 는 위기 상황에 몰린다. 1313년 3월 원나라의 심양왕 직을 고수하던 충선왕의 선위를 받아 왕위에 오른다. 이때 그의 나이는 20세였다. 충숙왕은 충선왕이 즉위전부터 원나라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어린시절을 거의 원나라에서 보냈다. 충숙왕 에게는 감이라는 형이 있었는데 충선왕이 왕위에 오르자 세자에 책봉되고 1310년 조정대신 들이 충선왕의 환국을 청원했지만 받아 들여지지 않자 몇몇 조신들이 세자 왕감을 중심으로 힘을 형성하려 하자 이미 충렬왕과 부자간의 세력다툼을 벌여본바 있는 충선왕은 세자 왕감과 그 주변 인물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충숙왕은 냉혹한 정치적 결단의 희생자가 된 동복형 왕감을 대신하여 고려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충선왕은 이복형 왕자의 아들인 조카 왕고를 총애하여 그를 세자에 세우니 왕고는 지속적으 로 왕위찬탈의 음모를 꾸며 충숙왕을 곤경에 빠트리곤 한다. 원나라 속국으로 전락한 고려는 1315년 원나라의 강요로 귀족과 천민들의 옷 색깔을 다르게 하는 정책을 실시 하였고 1316년에는 상왕인 충선왕이 자신의 심양왕 자리를 조카이자 세자인 왕고에게 넘겨 줌에 따라 왕위를 위협받게 된다. 심양왕에 오른 왕고는 원 왕실의 신뢰를 얻게 되자 그 힘을 바탕으로 고려 국왕의 자리를 넘보게 되고 충숙왕은 왕고의 형인 왕유를 단양부원대군으로 동생인 왕훈을 연덕부원대군으로 봉하여 심양왕 왕고 에게 화합의 손길을 내밀었다. 1316년 7월 충숙왕은 원나라 영왕의 딸 복국장공주와 결혼하여 원 왕실의 부마가 된다. 하지만 복국장공주는 고려에 온지 3년만 인 1319년 9월 의문의 죽음을 남기고 죽는다. 이 당시 제주도에 서 민란이 일어나 어수선한 분위기였고 충숙왕은 덕비홍씨를 잊지 못하고 자주미행을 나갔으며 정 사를 뒷전으로 하고 사냥과 주색을 즐기고 있었다. 또한 미행을 나갔다가 백성을 만나면 구타하는 일이 잦았고 왕의 폭력적인 경향이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공주의 부고가 원나라에 전해지자 사인규명을 위해 선사 이상지를 개경으로 보내 수 사하게 하였다. 공주의 궁녀와 요리사 한복만을 가두고 심문을 하자 1328년 8월 왕이 연경궁에서 덕비홍씨와 노는 것을 목격한 공주가 질투를 하다가 왕에게 얻어맞아 코피가 난 일과 그 다음날에 다시 유련사 에서 왕으로부터 심하게 구타당한 일을 실토한다. 이렇게 되자 원의 이상지는 궁녀1명과 요리사 한복만 을 원나라로 압송해갔고 충숙왕은 중서성에 공문을 보내 한복만이 거짓진술을 하였다고 변명하였다. 이 사건 이후 충숙왕은 원 왕실의 불신을 받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1320년 원에서는 영종이 새롭 게 즉위 하였고 심양왕 왕고는 영종의 신임을 받으며 충숙왕을 강하게 비토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충숙왕은 밤마다 연회를 열고 술에 젖어 살았으며 국고가 탕진되자 내서사인 안균을 경상 도 에 파견하여 돈을 거두게 하여 향락생활을 지속하자 대신들의 불만이 심화 되었고 왕은 상소를 올린 대신들을 마구 구타하여 조정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이같은 충숙왕의 행태는 왕고를 통하여 원 왕실에 보고되었고 1321년 3월 원나라 입조명령을 받아 충숙왕은 왕유에게 서무를 대리하게하고 연경으로 떠났다. 그리고 약 3년 동안 원나라에 붙잡혀 있 으면서 왕위를 노리고있던 왕고의 협박을 받으며 지내야 했다.
이 당시 충선왕은 본국으로 돌아가라는 영종의 명령을 거부 했다는 이유로 유배된 상태였고 충숙왕 은 거의 폐위된 상황 이었다. 왕고파인 유청신, 오잠 등은 원나라 도성에 서면을 보내 고려 국호를 페하고 고려를 원에 편입시켜 성을 설치해 달라는 요청을 하자 원 왕실은 이같은 터무니없는 요청 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원의 영종이 죽고 태정제 진종이 왕위에 오르게되자 상황은 급변한다. 태정제는 유배중이던 충선왕 을 다시 호경으로 불러 들이고 충숙왕을 풀어준다. 그래서 3년 가까이 왕위를 상실한 체 호경에 머 물고있던 충숙왕은 1324년 2월에 개경으로 돌아갈수 있었다. 왕고의 왕위찬탈 위협이 계속되자 충숙왕은 원의 지원을 받기위해 다시금 원나라 위왕 아가목의 딸 금동공주(조국장공주)와 혼인하였다. 그리고 충선왕도 충숙왕의 입지를 강화시키기 위해 태정제에게 충숙왕의 무고함을 간언한다. 하지만 이듬해 조국장공주가 용산원자를 낳고 산고로 인해 18세의 어 린 나이로 횡사한다. 이 때문에 충숙왕은 다시 궁지에 몰린다. 충숙왕의 입지가 약해진 틈을타 왕고의 왕위 찬탈음모가 다시 진행되고 왕고파인 유청신과 오잠이 원나라 중서성에 가서 충숙왕은 눈이 멀고 귀먹은 벙어리라 친히 정사를 돌볼수 없다고 거짓말을 하였고 충숙왕은 왕자 정을 세자로 책봉하여 원에 입조케 하였다. 충숙왕을 접한 원 매려는 유청신 과 오잠이 거짓말을 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한편 왕고가 심양왕직에 있기 때문에 고려 세자를 겸할수 없다는 충숙왕의 설명을 듣고 모든것이 왕고파의 무고라는 사실도 알게된다. 이 일로 입지가 강화된 충숙왕은 왕고의 도당인 조싣, 김온, 권하, 전굉 등을 순군옥에 가두어 귀양 보내는등 왕권강화 작업에 박차를 가한다. 그러나 몸이 약해져 1330년 2월 세자 정에게 선위하고 상왕으로 물러 앉아 있다가 그해 7월 원나라에 가서 머물렀다. 하지만 충혜왕이 정사를 돌보지 않고 주색에 빠져 음탕한 것을 일삼다가 원나라에 의해 폐위되자 1332년 2월 복위 하였다. 복위한 충숙왕은 원에 머물러 있으면서 민상정과 조염휘를 파견하여 정승 윤석을 비롯한 수십명에 대하여 왕을 잘못받든 죄로 삭직하고 유배 시켰다. 그리고 몽고여자 경화공주를 데리고 귀국하였다. 원나라가 지나치게 많이 요구하는 세공을 삭감케하고 공녀와 환관 의 징발을 중지 하도록 청원하는등 몇가지 업적을 세우기는 하였으나 대인 기피증이 심해져 신하들 을 멀리하고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그리고 복위 8년 만인 1339년 지병이 악화되어 4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충숙왕과 공원왕후 홍씨 사이에 충혜왕과 공민왕을 낳았다. ●공원왕후 홍씨는 공민왕의 급진적인 개혁정책을 반대하고 공민왕에게 누차에 걸쳐 신돈과 어울리 지 말것을 당부했다. 이 때문에 신돈과 대립하였고 신돈을 통해 개혁을 이루고자 했던 공민왕도 그 녀를 피하였다. 공민왕이 아들 우를 세자로 삼으려 하자 우가 신돈의 자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강력히 반대하고 백성을 괴롭히고 국가 재정을 소비하는 큰 공사는 제왕으로써 할바 가 아니라고 반대하고 나섰다. 우왕과도 곧잘 마찰을 일으키다가 1380년 8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 ● 숙공휘령공주 ?-1344년 원나라 귀족출신으로 추측 1339년 충숙왕이 죽은후 에 충혜왕은 영안 궁에서 수차례에 걸쳐 연회를 베풀고 그녀를 초대 하였다. 술좌석이 끝나고 충혜왕은 술에 취한척 하고 돌아가지 않고 있다가 그녀를 강간하였다. 이튿날 공주는 이일 이 수치스러워 원나라에 돌아 가려고 말을 구하려고 했으나 충혜왕이 개성의 말 시장을 못 열게 하였고 그 후 그녀는 1343년 원 나라 사신 두린 등이 와서 공주에게 어주를 전달하자, 공주가 전의 일을 고하고 두린은 대경타적과 낭중별실가 를 시켜 충혜왕을 붙잡아 갔다. 소생은 없었다.
■ 제28대 충혜왕 1315년-1344년.재위기간 1330년-1332년. 1339년복위-1344년. 6년간 16세에 즉위.
● 희대의 패륜아 충혜왕과 고려 왕실의 위기 1330년 2월 병약해져 정치에 염증을 느낀 충숙왕의 양위를 받아 16세에 왕에 올랐다.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충혜왕은 한나라를 통치할만한 인격을 갖추지 못했을 뿐 아니라 성격마져 포악하여 정사를 뒷전으로 미루고 향락과 여색에 젖어 지냈다. 즉위후 6일동안 정사를 페하고 사냥 을 즐기는가 하면 날마다 내시들과 씨름을 하며 놀았다. 또한 배전,주주 등에게 국가의 정책을 일임 하여 일부 관료들의 권력 남용이 극대화되고 자신의 행적을 기록한다는 이유로 사관들을 몹시 싫어 하여 근처에 오지도 못하게 하였다. 이같은 폐정이 2년동안 지속되자 원 왕실은 충혜왕을 연경으로 소환하여 근신명령을 내리고 충숙왕을 복위 시켰다. 하지만 연경에서 충혜왕의 행실이 고쳐지지 않 자 1336년 12월 고려로 돌려 보냈다. 그리고 1339년 3월 충숙왕이 죽자 충혜왕은 복위 하였다. 충혜왕은 닥치는 대로 음탕한 짓들을 일삼기 시작했는데 1339년 5월에는 부왕의 후비인 권씨를 강 간하였고 8월에도 역시 부왕의 후비인 숙공휘령공주를 강간하였다. 이처럼 자신의 서모까지도 서슴 없이 강간하던 충혜왕 이었기에 일반 민가의 아녀자들에 대한 이 같은 행위는 이루 헤아릴수 없을 만큼 많았다. 그런 가운데 원나라 조정은 그 해11월 중서성 단사관 두린과 직성사인 구통을 개경에 파견하여 충혜왕 에게 국새를 내려 복위를 인정하였다. 이들은 숙공휘령 공주를 찾아 원나라 왕이 보낸 술을 건넷는데 이때 공주는 충혜왕이 자신을 강간한 사실을 고하였다. 그러자 두린 일행은 수하들을 시켜 충혜왕을 비롯한 홍빈, 조운경 등을 포박하여 연경으로 압송하였다. 원나라로 압송 당한 충혜왕은 1340년 3월 형부에 갇혔고 김인, 김륜, 홍빈등도 함께 갇혀 심문을 당하였다. 그러나 충혜왕은 탈탈대부의 도움으로 풀려나 4월에 개경으로 돌아왔다. 이무렵 원나라에서는 고려 출신 여자 기씨를 순제의 제2왕후로 삼았는데 그녀가 바로 기황후로 기철의 누이 동생이었다. 충혜왕의 음행은「고려사」에 기록된 강간 사건만 수없이 기록되고 있는데 기록되지 않는일을 합한 다면 충혜왕의 음행은 실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1343년 3월 어느날 밤에는 민천사 누각에 올라 비둘기를 잡으려다 횃불이 옮겨붙어 누각을 불태운 일이 있었고 연회장을 만들기 위해 민가 백여채 를 헐고 토지와 재산을 강탈 하기도 하였다. 충혜왕의 이같은 학정이 계속되자 기철 등은 원나라 조정에 고하여 충혜왕의 폐정이 극에 달했다며 그를 소환하여 폐위 시킬것을 건의 하였다. 충혜왕의 악행을 보고받은 원나라 조정은 협의 끝에 그 를 소환하기로 결정하고 대경 타적과 낭중 별실가 등 6명을 보냈다. 이들은 하늘에 제사할 것 과 대사령을 반포하는 원나라 순제의 조서를 가지고 왔다는 핑계를 댓고 충혜왕은 그들을 마중하기 위 해 정동성으로 갔다. 이때 타적이 발로 왕을 걷어차 포박하여 원으로 압송하였다. 이때 왕과 함께 있던 백관들은 대부분 도주 하였다. 원으로 압송된 충혜왕은 원나라 조정의 결정에 따라 게양현으로 유배되었다. 그의 유배에 앞서 내려진 원 순제의 유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그대 왕정은 남의 윗사람으로써 백성들의 고혈을 긁어 먹는것이 너무 신하였으니 비록 그대의 피 로 온천하의 개에게 먹인다 해도 오히려 부족하다. 그러나 내가 사람을 죽이기를 즐겨하지 않기 때 문에 게양으로 귀양 보내는 것이니 그대는 나를 원망하지 말라" 고 하였다. 충혜왕은 유배가던중 악양현에서 1344년 정월 30세를 일기로 죽었는데 독살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죽음에 백성들은 아무도 슬퍼하는 사람이 없었다.
■ 제29대 충목왕 1337년-1348년. 재위기간 1344년 - 1348년. 4년간. 즉위 7세-12세.
● 어린 충목왕의 즉위와 덕령공주의 섭정 1344년 2월 고룡보가 여덟살 먹은 세자 흔을 안고 원나라 순제를 찿아 갔더니 순제가 흔에게 물었 다. "너는 아비를 본받으려고 하느냐 ? 아니면 어미를 본 받으려 하느냐 ? " 이에 흔이 어미를 본받 겠다고 말하자 순제는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교지를 내려 그를 고려 제29대 왕으로 책봉했다. 그리고 그의 모후 덕령공주가 섭정을 시작했다. 충목왕은 서연에서 우정승 채하중을 비롯한 수십명의 신하들로부터 학문을 배우고 정치와 예의를 익혔다. 1347년 정월에는 쌍성에 거주하고 있던 고려인의 숫자를 파악하게 하고 또한 각도에 파견 하여 토지를 측량하게 하였다. 덕령공주가 국가 기강을 바로 잡으며 경제 재건에 힘쓰고 있는동안 충목왕은 급속도로 병약해져 1348년 8월에는 건강이 매우 악화되었다. 이 때문에 덕녕공주는 충목 왕의 거쳐를 건성사로 옮겨 요양토록 하고 자신은 밀직부사 안목의 집에 거쳐를 마련하여 그곳에서 정사를 처결하였다. 충목왕은 모후 덕령공주의 지극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12세의 어린 나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 제30대 충정왕 1338년-1352년. 재위기간 1349년-1351년. 2년간. 12세-15세.
● 충정왕의 짧은 통치와 비참한 최후
충목왕이 죽자 고려조정 내에서는 왕자 저를 왕으로 세우는 것을 반대하는 무리들이 많았다. 그래서 노정, 손수관, 이군해 등이 그를 데리고 연경으로 떠나려 하자 전법관들이 회의를 소집하여 그들을 저지하려 하였다. 하지만 원나라 사신의 힘에 밀린 전법관들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결과 연경에 도착한 왕자 저는 그해 5월 순제로부터 왕에 책봉되어 7월에 왕위에 올랐다. 이때부터 덕령공주와 충정왕의 모후 윤씨 사이에 치열한 세력다툼이 전개 되었다. 이러한 세력다툼 으로 정국이 어수선한 가운데 1350년부터 경상도 일원을 중심으로 왜구가 기승을 부렸다. 왜구의 만행이 진행되자 민심은 흉흉하였고 관리들은 출전명령을 내려도 듣지 않고 오히려 왜구를 피해 피난을 떠나는 마당이었기 때문에 고려 조정은 속수 무책이었다. 이렇게 전국이 왜구로 인해 뒤숭숭한 가운데 원나라 순제는 고려조정을 안정시키기 위해 충정왕을 폐위시키고 강릉대군 왕기를 왕으로 세웠다. 충정왕은 강화도에 유배되고 몇 개월을 그곳에서 지내 다가 이듬해 3월 공민왕에 의해 15세의 어린 나이로 독살되었다. ● 왜구 [倭寇] 13∼16세기에 걸쳐 한국과 중국의 연안에 수시로 침입하여 인명을 해치고 재산을 약탈하던 일본의 해적집단. ■ 제30대 공민왕 1330년-1374년 . 재위기간 1351년 1374년 22년간. 22세즉위.
● 개혁주의자 공민왕의 배원 정책과 고려의 국권회복 14세기 중엽에 접어들면서 원은 홍건적의 봉기로 급격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이러한 시기에 즉위한 공민왕은 배원 정책을 골격으로 하는 일련의 개혁정책을 통하여 국권을 되찾 고 잃었던 북방의 영토를 회복하려 한다. 이로써 고려는 1백여 년간 지속된 원의 식민지배에서 벗 어나 자주적인 국가체제 구축을 위해 매진하게 된다. 사회 전반에 널리 퍼져있는 몽고 풍속을 없애 고 친원세력을 제거하는 동시에 일곱 차례에 걸친 대대적인 관제 개혁을 실시하여 문종시대에 완성 된 관제를 복구 하였다. 정방을 폐지하고 개혁교서를 발표하여 토지와 노비에 관한 문제를 해결할 것을 명령하고 1366년 신돈의 주도로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고 귀족들이 불법으로 겸병한 토지를 원 소유주자 에게 환원시키는 한편 억울하게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을 해방시키게 된다. 공민왕은 1352년 8월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린다. "옛날에 임금들은 일심전력하여 나라를 다스릴때 그 나라를 보존하려면 반드시 친히 국가의 정무를 봄으로써 자기의 견문을 넓히고 하부의 실정도 알게 되었으니 지금이 그렇게 할때다. 참의사,감찰사. 전법사, 개성부, 선군도관은 모두 판결 송사에 대하여 5일에 한번씩 계를 올리도록 하라"
이러한 명령은 왕의 친정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획기적인 조치였다. 공민왕의 강한 개혁정치에 위기를 느낀 판삼사사 조일신이 정변을 일으켜 공민왕을 협박하여 자신 을 우정승에 임명케 하고 자신의 측근들을 요직에 배치 하였다. 이후 공민왕은 조일신을 제거하고 왕권을 회복한다. 그리고 이제현을 우정승에 조익청을 좌정승으로 임명하여 명실공히 개혁정권을 수립하게 된다. 1352년 변발과 호복 등의 몽고 풍속을 금지 시켰으며 1356년 에는 원의 연호를 폐 지하고 관제를 문종대의 제도에 맞춰 복구 하였다. 정동행성중서성이문소를 철폐하고 기철을 숙청 했으며 이자춘의 내조에 힘입어 원나라 복속이후 일백년간 존속해온 쌍성총관부를 폐지하고 원나라 에 빼앗겼던 서북면 및 동북면 일대의 영토를 회복하기 시작한다. 승려 보우를 왕사로 임명하고 그에게 승직에 관한모든 권한을 대행토록 하는등 불교의 중흥을 도모 하기도 한다. 1356년 7월 고종말년에 원나라에 빼앗겼던 함주 이북의 땅을 수복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홍건적의 침입으로 다시 친원 정책으로 돌아서고 1355년 홍건적은 국호를 송이라 하고 고 려를 침범한다. 1361년에 다시 대대적인 2차 침입을 감행한다. 개경이 함락되자 공민왕은 안동으로 피난을 가게 되고 개경의 궁성이 완전히 전소되고 각도의 문화재와 사찰이 불타는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렇게 되자 반원정책을 포기하고 1361년 정동행성을 다시 설치 하였다. 1363년 찬성사 김용이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공민왕은 안도적의 희생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고 반란은 최영 과 오인택 등에 의해 제압된다. 1356년 2월 노국공주가 산고끝에 죽음응 맞이하자 공민왕은 절망에 사로 잡히게 되고 실의에 빠진 공민왕은 왕사 신돈 에게 정권을 내맡겨 조신들을 견제토록 한 후 공주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불사에 전념 하였다. 신돈의 세력이 왕권을 능가하기에 이르자 공민왕은 신돈이 부담스러웠고 이를 눈치챈 선부의장 이인이 1371년 7월 신돈을 역모로 고변하자 공민왕은 신돈을 수원으로 유배 시킨후 처형 했다. 신돈이 제거된 후 공민왕은 즉위 초의 개혁적인 성향은 거의 찾아볼 수없고 자주 술에 취해 있거나 노국공주에 대한 그리움을 이기지 못해 미행을 나가는 일이 잦아졌다. 이때부터 공민왕은 변태적인 행동을 자주하였다. 관음증에 빠지기도 하고 자제위를 두고 동성애를 즐기기도 했고, 후계자가 없음을 염려하여 홍륜, 한안등을 시켜 왕비를 강간토록 하고 그들 사이에 아들이 생기면 자기 자식으로 삼으려 하였다. 1374년 9월에 그는 내시 최만생 으로부터 익비가 아이를 잉태 했다는 보고를 받고 익비의 몸속에 있는 아이를 완전히 자기 자식으로 만들기 위해 그는 최만생에게 왕비와 같이 잔 홍륜과 그 무리를 죽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일을 안 최만생도 죽이려 하자 최만생은 홍륜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고 그 들은 침전에 침입하여 만취한 상태로 잠들어 있는 공민왕을 죽인다. 최만생과 홍륜 일당은 그 다음날 모두 체포되어 죽거나 유배됐다. 익비 한씨는 위화도 회군으로 우왕이 폐위될 때 조민수는 그녀에게 국새를 맡겼다. 그래서 그녀는 이성계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왕의 아들 창을 왕으로 세웠다. 하지만 이성계등이 창왕을 폐하자 이성계 일파의 건의를 받아들여 공양왕을 왕으로 세우라는 교서를 내렸다. 정비 안씨는 우왕, 창왕, 공양왕이 폐위된 뒤에 이성계 옹립 교서를 내리게 된다.
● 기철의 역모사건
그의 막내 여동생이 원나라에 공녀로 바쳐져 궁녀로 입궁 하였는데 순제의 눈에 들어 제2왕후의 자리에 올라 태자를 낳자 기씨 형제들은 그녀의 힘에 의지하여 원과 고려 조정에 영향력을 행사 하게 되었고 기철이 그 대표적인 인물 이었다.고려 조정은 기철을 정승에 임명하여 덕성부원군에 봉하고 기원은 덕양군에 봉했다. 기씨 형제와 왕실간에 다툼이 자주 일어났고 기씨 세력의 힘이 너무 강대하여 왕도 어찌하지 못했다. 즉위 초부터 개혁과 국권회복 운동을 전개하던 공민왕은 조일신의 정난 이후에 더욱 강하게 반원정 책을 실시했고 이는 곧 친원세력인 기씨 일파의 숙청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에 불안을 느낀 기철은 권겸, 노정 등과 모의 하여 공민왕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기철의 반란계획 을 눈치챈 공민왕이 1356년 3월에 이자춘을 불러 쌍성의 유민들을 동요하지 않도록 부탁한 다음 남양후 홍인박으로 하여금 기철, 권겸, 노책 등을 체포하여 처단함으로써 기철 일파는 완전히 몰락 하였다. 이어 곧 공민왕은 정동행성중서성이문소를 철폐하고 쌍성을 수복하여 서북면과 동북면 일 대의 옛 영토를 회복 하였다.
● 공민왕의 개혁작업을 수행한 사람들
● 현실주의적 개혁론자 이제현 1287년 1367년. 81세사망 이제현은 충렬,충성,충숙,충혜,충목,충정,공민왕 시대를 모두 거치면서 관직생활을 하였으나 단 한번 도 유배된 적이 없는 대단한 정치가이다. 고려에 최초로 성리학을 들여온 백이정 에게 배우고 권보 에게 학문을 익혀 이곡과 이색부자를 길러 낸 대학자이다. 이제현은 일시적인 감정이나 사리 사욕에 연연하지 않은 대범하고 절도 있는 인물이었고 고려의 자 주성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했던 현실적이면서도 지조 있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 이었다. 1353년 사직했다가 이듬해 우정승에 재임, 1356년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그 후 사직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다가 1362년 홍건적의 침입 때 왕을 청주(淸州)로 호종,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에 봉해졌다. 당대의 명문장가로 정주학(程朱學)의 기초를 확립하였고, 조맹부의 서체(書體)를 도입 하여 유행시켰다. 공민왕 묘정(廟庭)에 배향, 경주의 귀강서원(龜岡書院)과 금천(金川)의 도산서원 (道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효행록(孝行錄)》《익재집(益齋集)》《역옹패설(翁稗說)》《익재난고(益齋亂藁)》등이 있다.
● 급진 개혁론자에서 불청객으로 전락한 신돈 [辛旽, ?~1371] 고려말의 승려. 본관 영산(靈山). 속성 신(辛). 자 요공(耀空), 법명 편조(遍照), 돈(旽)은 퇴속하여 고친 이름. 호 청 한거사(淸閑居士). 계성현(桂城縣) 옥천사(玉川寺) 사비(寺婢)의 아들. 김원명(金元命)의 추천으로 공 민왕(恭愍王)으로부터 신임을 받고 사부(師傅)로서 국정을 맡았다. 1365(공민왕 14) 진평후(眞平侯) 라는 봉작까지 받아 가며 정치개혁을 단행하였는데, 그의 개혁정치는 고려 내부의 혼탁한 사회적 적폐(積弊)를 타개,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것으로,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이라는 토지개혁 관청 을 두어 부호들이 권세로 빼앗은 토지를 각 소유자에게 돌려주고, 노비로서 자유민이 되려는 자들 을 해방시켰으며, 국가재정을 잘 관리하여 민심을 얻었다. 이에 따라 노비에서 풀려난 사람들은 "성인이 나타났다며" 찬양했고 반면에 노비와 토지를 잃은 양 반들은 "중놈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고 비난 하였다. 신돈은 인사권을 비롯한 내외의 모든 권력을 장악한 후 강력한 개혁작업을 추진하는데 가장 중점을 두고 실시한 것은 노비제도와 토지개혁이었다. 그러나, 그의 급진적 개혁은 상층계급의 반감을 샀고, 왕의 신임을 기화로 점차 오만해져서 방탕과 음란을 일삼았으므로 점점 배척을 당하게 되었다. 영록대부집현전대학사(榮祿大夫集賢殿大學士)가 되어 1369년(공민왕 18년) 風水地理說 로 왕을 유혹, 서울을 忠州 로 옮길 계획을 세우고 스스로 오도도사심관 이 되려다 왕의 불신을 받았다. 그러자 왕을 살해하려는 역모(逆謀)를 꾸며 권력을 되 찾으려 하였으나 발각되어 수원(水原)에 유폐되었다가 1371년에 처형되었다.
■ 제32대 우왕 1365년-1389년. 재위기간 1374년 1388년. 재위13년간. 10세에 즉위.
1374년 공민왕이 최만생, 홍륜등에 의해서 살해되자 살인범을 체포하고 권력을 장악한 이인임 등은 우를 고려 제32대 왕으로 옹립하는데 이때 우왕의 나이는 겨우 10세였다. 공민왕은 자신이 살해 당하던 달인 1374년 9월 이미 사망하고 없던 궁인 한씨를 왕우의 생모라고 말한 다음 한씨의3대 조상과 그녀의 외조에게 벼슬을 추증한다. 또한 우왕 즉위후 에 순정왕후라는 시호가 내려진다. 그러나 정작 우왕의 친모인 반야는 우왕 2년에 자신이 왕의 친모라고 주장하다가 이인임에 의하여 죽음을 당하고 임진강에 수장되고 만다. 공민왕이 우왕의 친모를 궁인 한씨라고 말한 것은 반야가 신돈의 여종 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우왕이 폐위된 뒤에 이성계를 비롯한 조선 개국 공신들은 반야가 낳은 아들은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자식이라고 주장하며 우왕의 아 들인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세운다. 공민왕의 모후 명덕태후 홍씨도 우왕이 공민왕의 자식이 아니라 신돈의 자식이라 하고 우를 왕으로 세우는 것을 반대했다. 1378년에는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가 부여와 공주를 침입하여 목사 김사혁을 패주시키고 공주를 점 령한 사건이 발생하자 고려 조정은 왜구 소탕 작전에 나서서 1376년 에는 최영이 논산에서 대승을 거두고 1380년에는 나세, 최무선 등이 화약과 화포로 적선 5백여 척을 불사른다. 또한 이해에 황산에서 이성계가 왜구를 대파하고 1383년에는 정지가 서남해 에서 수백척의 적선을 궤멸시킨다. 1388년 명나라에서는 일방적으로 철령이북의 땅을 자신들의 요동부에 귀속 시키겠다고 통보해왔다. 철령이북이 원나라에 속해 있으니 당연히 자신들이 차지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에 조정은 회의를 거듭 하게 되고 결국 우왕은 최영의 건의를 받아들여 요동을 정벌하기로 한다. 한편으론 밀직제학 박의종을 시켜 철령이북 지역은 옛부터 고려영토였다는 편지를 명나라에 보냈다. 하지만 명나라에서는 왕득명을 파견하여 철령위를 설치한다는 통고를 고려 조정에 보내 왔다. 이에 우왕은 요동정벌을 위해 요동진 공격 계획을 수립하고 8도에서 군사를 징집 하였다. 그리고 그해 4월 최영을 팔도도통사로 삼고 조민수와 이성계를 좌우도통사로 임명하여 출전 명령을 내렸다. 그 해 5월 출병한 이성계와 조민수는 5만 군사와 함께 압록강의 위화도에 머물렀다. 하지만 불어난 물 때문에 진군을 못하고 있었고 시일이 지나면서 점차 병사들이 지치기 시작하자 우왕에게 회군을 허락해 달라는 요청을 하였지만 우왕과 최영은 여전히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이성계는 조민 수와 협의하여 군사를 돌려 회군을 단행한다. 회군에 성공한 이들은 최영과 그의 측근들은 체포 되 어 유배지로 떠났으며 우왕도 폐위 되서 강화도에 유폐되었다가 다시 1389년 11월 강릉으로 이배 되었다. 우왕은 신돈의 자식이라 하여 왕으로 인정받지 못하였고 그런 까닭에 능도 마련되지 않았으며 실록 도 편찬되지 않았다. ● 최영의 요동정벌과 위화도회군
●최영의 요동 정벌 - 1388년 명나라에서 고려의 철령이북 땅을 자신들의 요동부에 예속시키겠다 는 통보를 해 오면서 고려와 명 사이에 팽팽한 긴장이 감돌기 시작했다. 명나라가 요동부의 관리를 철령위를 설치하고 그 지역을 자신들의 영토로 굳히려 하자, 최영은 우왕에게 주청하여 요동정벌을 계획하였다. 최영의 요동정벌론을 받아들인 우왕은 전국5도의 각 성에 성을 수축할 것을 명령하고 군사를 서북방면에 집중배치 하여 명나라의 급습에 대비하였다. 한편 개경의 방비군을 동원하여 한 양의 중흥성을 축조하였다. 이는 전쟁상황에서 왕족을 중흥성에 이주시키려는 목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무렵 우왕은 자신의 신변안정을 위해 최영의 딸을 영비로 삼았다. 최영은 전쟁준비를 하면서 요 동정벌에 강하게 반대했던 공산부원군 이자송을 죽여 버렸다. 그 무렵 명 후군도독부에서 요동백호 왕득명을 보내 철령위 설치를 통고하였다. 이에 우왕은 문하찬성사 우현보에게 명령하여 개경을 지 키게 하고 요동진격을 준비하였다. 그러자 이성계는 요동공략에 반대하며 ‘사대불가론’을 주장하며 요동정벌계획을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러나 우왕은 출병을 강행하였다. 그러나 다시 이성계는 군대를 서경에 머물게 하였다가 가을에 출병 하는 게 좋겠다고 주장하였지만 우왕과 최영은 이 의견을 수용하지 않았다. 이 요동정벌에 출병한 병력수는 좌우군을 합쳐 총5천여 명, 동원된 말은 21682필이었으나 적군의 사기를 죽이기 위해 10만 병력이라고 말했다.
●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 1388년(우왕 14) 5월 요동정벌에 나선 우군도통사 이성계가 압록강 하 류 위화도에서 군사를 회군한 사건. 왜구의 토벌이 한창 진행되던 우왕 말년에, 고려와 명 나라 사 이에 영토 싸움이 일어났다. 명은 원의 쌍성 총관부 관할하에 있던 땅을 그들의 직속령으로 만들겠 다고 고려에 통보해 왔다. 이에, 고려의 조정은 크게 분개하여 요동 정벌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요 동 정벌을 둘러싸고 조정의 의견이 갈라졌다. 최영을 중심으로 하는 쪽은 싸움에 나가라고 주장 하 였고, 이성계를 중심으로 하는 쪽은 국내외의 상황으로 보아 요동 정벌은 실제로 불가능하다고 판 단하여 반대하였다. (철령위 문제) 결국, 최영의 주장에 따라 정벌군이 파견되었다. 고려에서 최영을 팔도도통사로 삼아 평양에 나아가 독전하게 하고 조민수를 좌군도통사,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정벌군을 이끌고 출정하게 하였 다. 처음부터 요동정벌론에 반대한 이성계는 정벌군이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 이르자 진군을 멈추고, 좌군도통사 조민수와 상의하여 첫째 요동까지는 많은 강을 건너야 하는데 장마철이라 군량 운반이 곤란하며, 둘째 모든 군사가 싸우러 나간 틈을 타서 왜구가 공격해 올 것이고, 셋째 지금은 덥고 비 가 오는 때라서 활을 붙인 풀이 떨어지고 군사들이 모두 병에 걸릴 것이고 냇째 소국은 대국을 섬 기는 것이 나라를 보호하는 길이니 요동정벌은 불가능하다고 상서로써 회군을 청하였다. 그러나 평 양에 있던 최영과 우왕이 이를 허락하지 않자, 이성계는 5월 20일 회군을 결행하여 군대를 국내로 돌이켰다. 돌연한 사태 변화에 최영은 개경으로 돌아와 회군해오는 정벌군과 싸우려 하였으나, 얼마 뒤 최영은 이성계에게 붙잡혀 고봉현으로 유배되었다가 죽음을 당하였고, 우왕도 강화도로 쫒겨났 다. 이를 계기로 이성계는 정치적, 군사적 권력을 한 손에 잡아 조선창업의 기반을 구축하게 되었다.
■ 제33대 창왕 1380년-1389년 . 제위기간 1388년 - 1389년. 재위 1년간 . 9세에 즉위.
● 어린 창왕의 짧은 치세와 신진세력의 득세
위화도 회군으로 최영세력이 축출되고 우왕이 폐위되자 조정은 회군세력에 의해 장악된다. 차기왕 을 세우는 문제로 이성계일파는 종친들 중에 한 사람을 택하여 왕으로 세우고자 하였는데 반해 조민수 일파는 우왕의 아들 창을 왕으로 세워야 한다고 고집하였다. 이에 조민수는 당시 명망 이 높던 이색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고 이색은 공민왕의 제3비 익비 한씨로 하여금 창을 왕으로 세 울것을 명령하는 교지를 내리도록 하였다. 이에 이색과 조민수가 권력의 핵심으로 떠오르고 이성계 는 병을 핑게로 사직을 청원 하였으나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이성계는 정도전, 조준 등과 협의하여 개혁을 단행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는데 많은 신진 관료들 이 이에 찬성하고 있었다. 개혁을 주도하던 조준은 관제, 신분, 국방 등 국정전반에 대한 혁신을 주 장하고 그 내용들을 이성계, 정도전 등과 협의하여 1388년 7월에 토지제도를 획기적으로 바꾸는 전제개혁소를 올렸다. 이때 조민수는 이들의 개혁안에 대해 지나치게 거부 반응을 보이다가 이인임 과 친척관계로 한때 부정한 짓을 하였다는 조준의 탄핵을 받아 그 해 8월 창녕으로 유배 되었다. 조민수의 유배는 문하시중으로 있던 이색에게는 큰 타격이었지만 이성계파의 전제개혁에 대한 주장 을 억제하며 가까스로 정권을 유지해 나갔다. 그러나 대세는 완전히 이성계파로 기울었고 이에 이색은 명나라 힘을 이용할 요량으로 창왕의 명나라 입조를 추진하지만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 스스 로 사직을 청하고 향리 장단으로 가서 머물렀다. 창왕이 사람을 보내 여러번에 걸쳐 조정으로 돌아 올 것을 청하였으나 이색은 등정하지 않았다. 1389년 11월 우왕의 복위 사간으로 반 이성계파가 대거 축출되자 곧 창왕은 폐위되어 강화도로 보내 졌고 그 다음 달인 12월 신종의 7세손인 공양왕이 즉위하자 왕명을 받은 대제학 유구에 의해 창왕은 죽음을 맞이 한다. 우왕과 창왕과 마찬가지로 신돈의 후손이라 하여 실록이 편찬되지 않았다.
■ 제34대 공양왕 1345년 -1394년 . 재위기간 1389년 - 1392년 . 재위 2년간. 45세 즉위.
● 고려의 마자막왕 공민왕과 고려왕조의 최후 1389년 11월에 발생한 우왕의 복위 사간이후 이성계 일파는 정몽주 등과 결탁하여 폐가 진입의 명 분으로 창왕을 폐하고 정창군 왕요를 옹립한다. 남은, 조준, 정도전등 급진 신진세력은 유교적 왕도 정치를 꿈꾸었고 역성혁명을 강행하여 이성계를 왕으로 옹립하고 철저한 유교사회를 건설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온건파인 정몽주, 이숭인 등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고려왕조를 유지 하면서 순차적으로 개혁을 실시하여 사회 전반에 무리가 없도록 하는 것이 신하의 도리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역성혁명을 꿈꾸는 남은 등을 경계하며 제거할 기회를 노렸고 1392년 3월 명나라를 방문하 고 돌아오는 세자 왕석을 마중하러 갔던 이성계가 황주에서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낙상하여 등청 하지 못하자 4월에 정몽주가 조준, 남은, 정도전, 남재, 조박, 오사충 등의 급진파를 탄핵하여 유배 시켜 버렸다. 이소식을 들은 이성계는 아픈 몸으로 가마에 실려 부랴부랴 개경으로 돌아와야 했고 이방원은 이들 온건 개혁파의 실력행사에 위기감을 느낀 나머지 조영규 등의 수하들을 시켜 정몽주를 살해한다. 이성계와 조준은 역성혁명에 걸림돌이 되는 세력들을 차례로 제거하고 6월에 남은과 정도전을 유배 지에서 소환하여 중책에 앉혔다. 정도전이 정계에 복귀 하면서 역성 혁명은 구체화 되었고 마침내 1392년 7월 정도전, 남은, 조준, 배극렴 등은 공양왕을 폐위 시키고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할 것을 결정한다. 이들은 정비 안씨를 찾아가 공양왕의 폐위와 이성계의 옹위를 명령하는 교지를 요청하였고 정비가 이를 수용함으로써 이성계는 고려 국왕에 오른다. 그리고 이듬해 2월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여 새로운 왕조를 열었다. 이로써 고려 왕조는 개국한지 474년만에 공양왕을 끝으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 충절의 대명사 정몽주 [鄭夢周, 1337~1392] 고려 말기의 문신·학자. 본관 영일(迎日). 자 달가(達可). 호 포은(圃隱). 초명 몽란(夢蘭)·몽룡(夢龍). 시호 문충(文忠). 영천 (永川) 출생. 1357년(공민왕 6) 감시에 합격하고 1360년 문과에 장원, 예문검열(藝文檢閱)·수찬·위 위시승(衛尉寺丞)을 지냈으며, 1363년 동북면도지휘사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으로 여진족(女眞族) 토벌에 참가하고 1364년 전보도감판관(典寶都監判官)이 되었다.
이어 전농시승(典農寺丞)·예조정랑 겸 성균박사(禮曹正郞兼成均博士)·성균사예(成均司藝)를 역임하고, 1371년 태상소경보문각응교 겸 성균직강(太常少卿寶文閣應敎兼成均直講) 등을 거쳐 성균사성(成均 司成)에 올랐으며, 이듬해 정사(正使) 홍사범(洪師範)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1376년(우왕 2)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이인임(李仁任)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 언양(彦陽)에 유배, 이듬해 풀려나와 사신으로 일본 규슈[九州]의 장관에게 왜 구의 단속을 청하여 응낙을 얻고 잡혀간 고려인 수백 명을 귀국시켰다. 1379년 전공판서(典工判書)·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예의판서(禮儀判書)·예문관제학·전법판서·판도판 서를 역임, 이듬해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이성계(李成桂) 휘하에서 왜구토벌에 참가하였다. 1383년 동북면조전원수로서 함경도에 침입한 왜구를 토벌, 다음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성절 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가서 긴장상태에 있던 대명국교(對明國交)를 회복하는 데 공을 세웠다.
1386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고 이듬해 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수원군(水原君)에 책록되었다. 1389년(창왕 1) 예문관대제학·문하찬성사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하고, 1390년(공양 왕 2)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도평의사사병조상서시판사(都評 議使司兵曹尙瑞寺判事)·경영전영사(景靈殿領事)·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익양군충의백(益陽郡忠 義伯)이 되었다. 이성계의 위망(威望)이 날로 높아지자 그를 추대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고 이성계 일파를 숙청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392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황주(黃州)에 드러눕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방원(芳遠:太宗)의 기지로 실패, 이어 정세를 엿보려고 이성계를 찾아보고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善竹矯)에서 방원의 부하 조영규(趙 英珪) 등에게 격살되었다.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유학을 보급하였으며, 성리학에 밝았다. 《주자가례(朱子家禮)》 를 따라 사회윤리와 도덕의 합리화를 기하며 개성에 5부 학당(學堂)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진 흥을 꾀하는 한편 《대명률(大明律)》을 참작, 《신율(新律)》을 간행하여 법질서의 확립을 기하고 외교와 군사면에도 깊이 관여하여 국운을 바로잡으려 했으나 신흥세력인 이성계 일파의 손에 최후 를 맞이하였다. 시문에도 뛰어나 시조 〈단심가(丹心歌)〉 외에 많은 한시가 전해지며 서화에도 뛰 어났다. 고려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1401년(태종 1) 영의정에 추증되고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 에 추봉되었다. 중종 때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등 11개 서원에 제향 되었다. 문집에 《포은집(圃隱集)》이 있다.
● 충절의 대명사 두문동 칠십이현 [杜門洞七十二賢] 조선의 개창에 반대해 두문동에서 끝까지 고려에 충성을 바치며 지조를 지킨 72명의 고려 유신(遺 臣)을 이르는 말. 72명의 이름은 현재 모두 밝혀지지는 않았고, 신규(申珪) ·신혼(申琿) ·신우(申瑀) ·조의생(曺義生) · 임선미(林先味) ·이경(李瓊) ·맹호성(孟好誠) ·고천상(高天祥) ·서중보(徐仲輔) 성사제(成思齊) ·박문수 (朴門壽) ·민안부(閔安富) ·김충한(金沖漢) ·이의(李倚) 등의 이름이 밝혀져 있다. 두문동은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光德面) 광덕산 서쪽 기슭에 있던 옛 지명으로, 칠십이현이 모두 이곳에 들어와 마을 의 동 ·서쪽에 모두 문을 세우고는 빚장을 걸어놓고 밖으로 나가지 않은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후세에 절의의 표상으로 숭앙되었고, 1783년(정조 7)에는 왕명으로 개성의 성균관(成均館)에 표절 사(表節祠)를 세워 배향하게 하였다.
●정도전 [鄭道傳, 1337~1398]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학자. 본관 奉化. 자 宗之. 호 三峰. 1362년(공민왕 11) 진사, 이듬해 忠州司錄을 거쳐 典敎寺主簿)·通禮門 祗候를 지내고 부모상으로 사직하였다. 1370년 성균박사가 되고 이어 太常博士를 거쳐 예조정랑 겸 禮曹正郞兼成均太常博士가 되어 銓選을 관장하였다. 1375년(우왕 1) 成均司藝 ·知製敎 등을 역임하 였고 이해 권신 李仁任· 慶復興 등의 親元排明 정책을 반대하다 會津縣에 유배되었다. 1377년 유형을 마치고 고향 영주(榮州)에서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 종사하며, 특히 주자학적 입장 에서 불교배척론을 체계화하였다. 1383년 동북면도지휘사(都指揮使) 李成桂의 막료가 되었고 이듬 해 성절사(聖節使) 鄭夢周의 서장관이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1385년 성균제주(成均祭酒), 이듬해 남양부사(南陽府使)로 있다가 1388년 이성계의 천거로 成均大司成 에 승진하였다.
이성계의 우익으로서 조준(趙浚)과 함께 전제개혁론을 주장, 1389년(창왕 1)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승진하였고 창왕(昌王)을 폐위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옹립하는데 적극 가담하여 봉화현충의군(奉化 縣忠義君)에 책록되었다. 1390년(공양왕 2) 경연지사(經延知事)로 성절사 겸 변무사(聖節使兼辨誣 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동판도평의사사사 겸 성균대사성(同判都評議使司事兼成均大司成)·삼사 부사(三司副使) 등을 역임하였다. 그 해 조민수(曺敏修) 등 구세력을 몰아내고 전제개혁을 단행하여 과전법(科田法)을 실시하게 함으 로써 조선 개국의 정치·경제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듬해 이성계가 군사권을 장악하여 삼군도총제 부(三軍都摠制府)를 설치하자 우군총제사(右軍摠制使)가 되고 이어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재직 중, 구세력의 역습으로 탄핵을 받아 관직을 박탈당하고 봉화로 유배되었다. 1392년 한때 풀렸으나 정몽 주의 탄핵으로 투옥되었고 정몽주가 살해된 뒤 풀려나와 조준·남은(南誾) 등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 조선 건국의 주역이 되었다.
그 공으로 분의좌명개국공신(奮義佐命開國功臣) 1등에 녹훈되고,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예문춘추관사(藝文春秋館事)에 임명되어 사은 겸 정조사(謝恩兼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4 년(태조 3) 한양천도 때는 궁궐과 종묘의 위치 및 도성의 기지를 결정하고 궁·문의 모든 칭호를 정 했다.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찬진하여 법제의 기본을 이룩하게 하고 1395년 정총(鄭摠) 등 과 《고려사》 37권을 찬진했으며, 1397년 동북면도선무순찰사(都宣撫巡察使)가 되어 성을 수축하 고 역참(驛站)을 신설했다. 제l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李芳遠)에게 참수되었다.
유학(儒學)의 대가로 개국 후 군사·외교·행정·역사·성리학 등 여러 방면에서 활약하였고, 척불숭유 (斥佛崇儒)를 국시로 삼게 하여 유학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저서에 《삼봉집 (三峰集)》 《경제육전(經濟六典)》 《경제문감(經濟文鑑)》 《심기리편(心氣理篇)》 《불씨잡변(佛 氏雜辨)》 《심문천답(心問天答)》 《진법서(陳法書)》 《금남잡제(錦南雜題)》 등이 있고, 작품에 〈납씨가(納氏歌)〉 〈정동방곡(靖東方曲)〉 〈문덕곡〉 〈신도가(新都歌)〉 등이 있다. |